즐겁게 웃는 이들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추억을 고통스럽게 껴안고 살아간다
거리엔 낙엽들이 바람에 쓸린다. 산의 초입에서부터 밟히는 낙엽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온통
낙엽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된다. 고개 들어 바라보이는 나무에는 가지만 앙상하다. 낙엽들은
내년 봄을 예비하며 땅에 묻힐 것이다. 사계절이 명확한 자연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나고
죽는 것을 극명하게 배운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생명을 느끼다가, 문득 주름으로 덮인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아, 죽음이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님과 아이들, 이 혈연
관계는 우리 생활의 기본 고리이며 이 관계에서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 못지 않게 우리와
인접해 있다. 결국 죽음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늘 우리 곁에 있다. 즐겁게 웃는 이들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추억을 고통스럽게 껴안고 살아간다.
우리 민족만큼 죽은 사람의 추억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민족도 없으리라.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살며 사랑하며 일하는 순간 순간에 죽은 사람들은 산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추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일상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장례 문화는 예전의 농경 사회에서 뿌리 내려온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세계화, 우주화를 외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3일장 혹은 5일장을
지키고, 영안실은 언제나 떠난 이에 대한 마지막 인사를 위해 북적거린다. 중년을 지나면서
더욱 빈번하게 결혼식 청첩장과 아울러 수도 없는 ‘영안실 갈 일’이 스케줄 표의
저녁시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영안실에 가지 않는다고 누구도 심하게 탓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참하지 못하면 미안한 마음은 스스로의 짐이 되어 오랜 시간 채무자처럼 마음이
옥죄이고 죄책감으로 기를 펴지 못하게 된다. 더욱 난처한 고민은 참석의 한계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 ‘부모’와 ‘형제’, ‘처가’와 ‘조부모’ 기타 ‘가까운 친척’이란 범위의
어디에 그 한계를 설정해야 하는가 매우 모호해질 때가 있다.
사회에서는 우리의 장례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반면,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마치 윤리 도덕 면에서 미성숙한 표본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전통은 시간의
흐름에 의해 형태가 이루어지지만 점진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아무도 전통의
급격한 개선을 주도할 수 없지만,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애경사에의 참석 여부가 인격이나
친불친의 척도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민족마다 다른 문화가 있지만 그 민족문화를 형성하는 개개인의 생각은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와 같지 않은 생각을 ‘틀린 생각’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나와
‘다른 생각’이라 이해하는 사회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행여 본래의 뜻에서 어긋난 ‘가족 이기주의’가 노출되지 않게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진심 어린 슬픔으로 죽은 자와 이별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살아
있는 자’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떠나는 이의 마지막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문화복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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