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성 II가 바슐라르에서처럼 ‘천재들"의 놀라운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조주의자인 알튀세는 이런 주체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역사는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이 변해 온 과정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으로서의 일반성 II 역시 이런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역사 역시 일반적인 역사의 지평에서 이해되며, 알튀세의 인식론서에는 ‘인식 주체"가 소멸하게 된다.
인식 주체 이전에 ‘문제틀(problematique)"이 있다. 주체는 이 문제틀 어디엔가 자리잡음으로써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은 과학적 문제틀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론적 실천"이 경험적 실천, 기술적 실천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가공하는 과정이다.
일반성 III이 경험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경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인식은 경험 ‘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 ‘에로’ 내려와야 현실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튀세는 ‘현실의 구체(the concrete-reality)"과 ‘사유의 구체(the concrete-of-thought)"를 구분한다.
이와 같은 인식론에는 바슐라르 못지 않게 스피노자의 사유가 깔려 있다(그래서 바슐라르는 ‘진정한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린다). 스피노자에게서 사유는 주체의 행위가 아니다. 주체의 사유 행위가 사유의 한 변양태이다.
그래서 알튀세는 스피노자에 입각해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2) 알튀세는 또한 구조주의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현상학적 인간주의 역시 비판한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이며 주체적 존재라는 생각은 앞에서 보았듯이 환상이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생각이다. 하부구조의 작용을 깨닫지 못하고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념론이 인간주의인 것이다.
3) 그렇다고 알튀세가 하부구조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경제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에서 경제주의란 교조화된 맑시즘으로서 모든 역점을 경제에 두는 스탈린적 맑시즘이다.
알튀세는 이 경제주의를 또한 ‘기계주의"라고도 부르며 또 ‘생산주의"라고도 부른다. (스탈린이 그랬듯이) 생산력의 증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생각, 그리고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이고 단선적으로 결정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서의 단순함과 역사철학에서의 선형성을 전제한다. 알튀세는 이런 생각을 ‘통속적 맑시즘"이라고 부르며 이 맑시즘이 강조하는 ‘경제 결정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튀세 역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심금들(instances)" 중에서 경제적 심금이 ‘최종 심금"임을 말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지배적인 모순"이 반드시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etermination)에 의한 모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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