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법률사무소 hhjun@daeoe.com
어느 방송사에서 의료분쟁에서 환자는 이기기가 힘들다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담당 PD가 의료사고로 인한 환자의 피해를 보상해 주기 위해서는 의료분쟁조정법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과연 의료분쟁에서 환자는 이길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의료분쟁조정법만이 유일한 대안일까? 오늘은 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한 해 어느 정도의 의료분쟁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다만 2002년 사법연감에 의하면 2000년 한 해 법원에 접수된 의료민사사건이 519건이고, 2001년에는 666건으로 전년 대비 28% 증가하였다. 그러나 의료분쟁이 소송화 되는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좀 오래된 자료지만 대한의사협회가 1987년 의료사고를 경험한 개원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 6.0%만이 재판을 통해 해결하였다고 대답하였다.
15년 이상 지난 자료이고, 그 동안 국민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점을 감안한다면 위의 6.0%는 너무 낮은 수치로 현재는 적어도 10%는 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의료행위의 수가 절대적으로 증가한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한 해 약 7,000건 정도의 의료분쟁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중에서 보상을 받는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가 문제가 되는데 위 사법연감을 보면 접수된 666건 중 처리된 사건이 585건이고 그 중 환자가 일부라도 배상을 받은 사건은 365건으로 승소율이 62%에 이른다.
이러한 승소율은 일반 사건의 승소율과 비교해 보아도 낮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의료분쟁을 하면 환자가 이길 수 없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에 소송화 되지 않는 대부분의 분쟁들이 당사자 사이의 합의(법률용어로는 화해계약)에 의해 해결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위 명제는 참일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이 환자들로 하여금 위 명제에 동의하도록 하는 것일까?
첫째, 변호사의 문턱이 높아 소송을 의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소송이 장기화되어 환자에게 신속한 구제를 해 줄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의료소송에 있어 필수적으로 거치는 사실조회와 진료기록감정 및 신체감정의 경우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1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아 소송지연의 주범이 되고 있다.
셋째, 환자측의 비법률적 대응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료분쟁이 발생하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기존에 가졌던 의사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심한 혐오감을 가진 채 대화를 하거나 합의를 시도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제대로 된 이해 및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부족한 의학 및 법률지식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조력자가 부족한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환자가 대등하게 의사와 대화하고 합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변호사가 아니어도 된다)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의료계에서 한창 논의되고 있는 의료분쟁조정법도 먼저 의료분쟁조정위원회가 이러한 조력자가 될 수 있도록 그 구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잘못하면 위 위원회가 오히려 의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환될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될 경우 법률로 또 하나의 옥상옥(屋上屋)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기 때문이다.
즉 의료분쟁조정법은 제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졸속으로 만들 수는 없다. 환자와 의사, 정부와 국민의 광범위한 의견 조율 및 합의하에 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졸속입법의 폐허를 무수히 경험하여 왔다. 이번에도 똑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료분쟁조정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의료계가 주장하는 것 중에는 정말 국민들의 이해에 근거한 동의가 없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들이 다수 있다. 이러한 사항들에 대하여 의료계에서 국민들에 대하여 이해를 시키고 그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의약분업 당시 신문지면을 차지하던 홍보광고를 다시 볼 수는 없을까? 진정으로 의료분쟁조정법이 제정되려면 이러한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