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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그리고 나 / 정승룡

관리자 기자  2004.06.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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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모든 시름
바람결에 흘러가 버리고
상쾌한 기운만이 나를 싸고 돌아

 


예과 2학년 여름방학때 이었다.


재시험까지 겨우 무사히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같은 과 동기 4명이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넷이서 기차를 타고 차창에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참여행 분위기에 빠져 있는데 성난 차장 아저씨가 질질 샌 듯한 석유통을 들고 다니며 “이거 임자가 누구요?”하고 돌아 다녔다. “에그! 칠칠치 못하게 누가 석유를 바닥에 새게 했담!”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까이 오는 걸 가만히 보니 내가 가져온 연료통이었다. 한쪽 구석에 배낭하고 함께 세워 놓았었는데 넘어져서 바닥에 흐른 모양이었다. 차장실에 불려가며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


읍소형으로 할 것인가 뇌물형으로 할 것인가, 한참 훈계를 듣고 대학생임이 십분 정상이 참작돼 겨우 도중하차를 면하고 무마됐다. 남원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때 이른 장마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빗줄기가 구겨진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냈다.


백무동에서 산행을 시작해 하동바위 참샘을 거쳐 소지봉 망바위 장터목산장에 이르고, 아침에 천왕봉 일출 그리고 세석산장, 벽소령 산장을 지나 연하천 산장, 토끼봉, 뱀사골 산장을 지나 반야봉에 이르니 때 이른 가을잠자리의 군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나는 본과 4학년때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할 때쯤 한가지 걱정이 생겼다. 아내가 산을 좋아할까 하는 것이었다. 데이트하며 근교의 산을 몇 번 같이 가며 유심히 살피니 다람쥐처럼 뽈뽈뽈 산을 잘 가서 기뻤다. 신혼시절에 텐트를 가지고 지리산 종주를 두어 번 같이 했었는데 갈 때마다 짐을 싸는데 먹을 것을 엄청나게 싸는 것이었다. 사과·귤 등 과일을 배낭에 싸고 손에도 한 무더기를 들었다. 그걸 언제 다먹으려고 그렇게 많이 싸냐고 하며 내놓고 가래도 기어이 손에 들고 나서더니 버스를 타고부터 먹기 시작해서 산행초입에서 거의 먹어 치운 놀라운 식성을 보였다.


우리랑 같은 기차를 타고 와서 산행을 시작한 대학생들을 3박4일후 집에 가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우리를 보더니 “아∼아! 그때 열심히 드시던 부부시군요?” 하고는 우리를 기억했었다. 지금도 음식은 사양을 안하는데 키가 160에 몸무게는 45에서 50을 왔다 갔다 하니 그 몸도 복받은 몸매인가 보다.


장터목산장에서 조금 올라가면 제석봉 근처에 고사목 지대가 나타난다. 과거 어수선하던 시절에 어떤 벌목꾼이 벌목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개인 욕심으로 지른 불이 남은 흔적인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들이 능선 위에 하얀 뼈를 내놓고 서있는 모습은 많은 상념에 잠기게 해준다. 불을 지른 사람과 어수선한 사회를 만든 모든 사람들의 업보가 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밝은 사회를 가꿔가야 할 임무와 함께 환경보호 등의 많은 경계를 주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은 해마다 신년이 되면 전국 각지의 등산객들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도 천왕봉에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재야의 밤이면 수많은 등산객이 야간산행을 나선다. 재작년에 평소 알고 지내던 기공소 소장하고 둘이서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한 적이 있었다. 백무동에서 밤11시경 야간 산행을 시작해 새벽 6시경 일출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천왕봉 근처에 새벽 4시경 도착하였는데 방한준비가 약간 부족하였던 나는 생각보다 살벌한 추위에 발발 떨던 기억이 지금도 가장 많이 남아있다.


천왕봉 일출은 참 보기가 어렵다. 속설에 3대에 걸쳐 선업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십번 천왕봉을 올라갔지만 고운 일출을 본 것은 한 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 전 겨울에 눈비가 온 뒤에 운해가 마치 바다처럼 산 주위를 넘실거리고 먼 산 봉우리에는 구름이 폭포처럼 흐르던 장엄한 일출을 맞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무게 때문에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