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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 역사(23)] 경성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의 병원

관리자 기자  2005.01.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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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의 병원은 임상실습을 위한 진료실로 출발했다. 1924년 4월 경성치과의학교(京城齒科醫學校)는 3학년생의 임상실습을 위하여 총독부의원 안에 10평정도의 치료의자 5대를 갖춘 진료실을 만들었고, 6평 정도의 기공실도 설치했다. 진료실에는 오카다 타다시(岡田正)·야오 타로(失尾太郞)가 임상실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나기라 다쓰미는 1923년 8월 27일 구미 각국의 교육 상황을 시찰하기 위하여 출발하여 약 1년간 자리를 비웠다.


이때의 경성치과의학교의 모습을 오카다 시로(岡田四郞)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학년은 낡은 계단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고, 2학년은 건너편의 기공실에서 무엇인가 제작에 열중하고, 3학년은 임상실습을 위한 환자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3학년은 모두 31명으로 일본인 5인, 한국인 여학생 3명이 포함되어 있었고, 박원일(朴元一)이 총대였다.
임상실습을 위한 병원에는 개원 제1일부터 환자가 잇달아 왔다. 이들은 학생의 아는 사람들이었다. 예진을 통해 간단한 농루의 발치는 학생에게 하게 했다. 처음 4~5일은 무사고였지만 일반 환자가 조금씩 늘어남에 따라 의료사고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진료실은 31명의 학생이 임상실습하기에 부족한 시설이었다. 1924년 7월 24일 나기라 다쓰미가 돌아오자, 1924년 10월 황금정(을지로)의 일본생명 빌딩 일부를 차입하고 시설과 장비를 정비하였다. 치료의자 27대가 설치되었고, 특별히 예진 및 특진실은 승강의자 1대, 독일 시멘스의 엔진과 시멘스의 렌트겐 설비 일체, 독일 하노버 자외선 장치, 태양등 장치를 갖춘 당시로서는 조선에서 일류설비로 갖추었다. 이때에 치과용 렌트겐 장치는 5000원이나 하는 고가였다. 1925년 4월 15일부터 이전 임상실습이 시작되었다.


1924년 10월 부속병원은 처음에 주임 후구이 마사루(福井 勝)체제로 운영하다가 노자와 킨(野澤釣)이 부임하고 원장이 되어 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출처: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