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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 역사(24]경성치과의학교의 교사 건축

관리자 기자  2005.01.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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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치과의학교의 수업은 처음에는 총독부의원 건물을 빌려 사용했으며, 또한 교사가 없어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사에서 수업을 했다. 1926년 5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발족함에 따라 이제까지 사용했던 경성의학전문학교 건물 및 총독부의원 건물을 반환해야 했다. 교사가 없어서 경성치과의학교는 ‘폐지하느냐 존속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됐다. 총독부당국은 나기라 다쓰미에게 인구에 비해 치과의사수가 적으므로 학교를 존속시켜 경영하도록 권고했다.


이 무렵 치과의학 교육에는 교사 건축이 중요 문제가 됐다. 나기라 다쓰미)는 학교와 병원을 같이 건축할 관유지를 얻도록 재무국의 관유지계에 부탁했다. 시 중앙부에 환자가 오기 쉬운 곳을 희망한 결과 저경궁의 자리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토지는 경성부에서 아동공원으로 인가 직전의 상태였다.
나기라 다쓰미는 이 토지 외에 다른 적당한 토지를 구할 수 없었다. 간곡히 간청한 결과 총독이 제네바의 회의에 가기 직전에 허가됐다. 경성부윤이 총독부의 정무총감을 방문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그것은 총독의 결재한 후의 일이었다.


1927년 6월 6일 건축에 착수해 11월 17일에 상량식을 가졌다. 공사비는 우선 식산은행에서 십만원을 차입하고, 나머지는 토지의 무상 양여로 받아 이것을 담보 삼아 십오만원을 차입해 교사를 신축했다. 이 과정에서 나기라 다쓰미는 굳은 결심으로 야마나시(山梨)총독과 면접해 학교의 새로운 입장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 결과 토지도 총독의 결정으로 무상 양여됐고 보조금도 2만원 증액됐다. 이러한 차입금으로 학교를 건축하는 것은 나기라 다쓰미 후원자인 총독부의원장 시가 키요시(志賀潔)에게도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나기라 다쓰미는 공공사업을 위한 일이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25만원의 차금으로서 학교건축을 하게 됐는데 하루는 志賀潔원장이 자택에 찾아오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志賀潔원장이 柳樂達見가 30만원의 차금을 해 향후 어떻게 경영해 갈려는 것인가 대단히 근심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사치를 해 사용된 차금이 아니고 공공사업을 위해 만일 벌거숭이가 되더라도 하등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다. 이 일은 내 처에게도 분명히 들려주었으므로 걱정하지 말도록 이야기했다. 志賀潔원장은 그 때 군이 그렇게 까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낙성식은 1928년 9월 29일 거행됐다. 저경궁터에 세워진 이 건물은 지상 4층으로 연건평 981평7홉5작이었으며 45실의 근세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총공사비는 281,270원(공비 및 내용 설비비 모두)이었으며, 1927년 5월 3일 기공해 1928년 9월 2일 준공했다. 1933년 7월 1일 교사의 일부만 4충이었던 것을 전부 4층으로 증축했다. 1943년 11월 1일 본 교사 서쪽에 창고용 2층 건물을 신축했다. 건물은 부속병원과 학교에서 쓰기에 충분한 시설을 갖추게 됐다.
1928년 10월 2일 경성의학교는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교로 인가됐다. 1929년 10월 27일에는 학교재단법인으로 인가(이사 3명, 감사 2명)를 받았으며, 이사장에는 진남포의 실업가 토미타 기사구(富田儀作)가 취임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 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