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들이 단체를 조직한 것은 친목과 권익 때문이었다. 1912년 1월 16일 서울에 경성치과의사회를 처음 설립하였다. 전국적인 규모의 치과의사회가 필요하게 되자 경성치과의사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가 창립위원장이었고 경성치과의사회의 임원인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미쓰다 소오(滿田操) 등이 위원이 되어 조선치과의사회를 설립하였다.
1921년 10월 2일 조선치과의사회는 조선에 있는 일본인 치과의사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조선치과의사회의 창립총회는 장곡천정 은행집회소(현재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서 개최하였다.
조선치과의사회의 설립 배경은 행정적인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치과의업에서 치과의사들은 입치사와 구별이 없었다. 그 무렵 입치사들이 진료와 광고의 한계를 넘어 치과의사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정도가 심하였다. 그러므로 치과의사들이 단결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경성치과의사회의 대표로서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와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가 입치사의 단속, 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이사청에 있는 미우라 지고로오(三浦彌五郞) 이사관에게 이러한 문제를 자주 언급했으나 전국적인 대표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조선치과의사회의 설립 배경에는 치과의사회를 사회적으로 올바르게 인식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행정당국의 행사시에 의사회는 초청 받으나, 치과의사회는 초청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에서 의사회를 참석시키는 경우 치과의사회도 함께 참가하게 했다. 이 후 경성치과의사회,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 조선연합치과의사회는 일반 의사회와 동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설립 당시 회원은 22명 정도로 추정된다. 창립기념사진에는 내빈인 총독부 위생과장 무라타 쇼케이(村田昇淸) 외에 22명의 얼굴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大澤義誠, 柳樂達見, 生田信保, 利根川淸治郞, 外圭三, 滿田操, 佐野捨吉, 廣瀨文質, 堤○○, 三科○○, 지방의 치과의사로서 부산의 高橋貞一, 別府禮吉, 能野種冬, 櫛橋源太郞, 경남 통영의 河內一宗, 평양의 藤井康基, 竹下○○, 마산의 野 村親俊 등이 참석하였다. 당시 총독부의 방침은 조선치과의사회를 지방 단체를 규합해서 만들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부산, 평양에만 치과의사회가 있을 뿐이었다. 지방의 치과의사회를 설립한 후 전국적인 단체를 조직하기는 시간적으로 어려우므로 우선 중앙에 만들어 놓고 각 지방에서 회원을 개인별로 참석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총회 경비는 재료상인 일본의 고바야시 토미타로오(小林富太郞) 서울의 사까이 코오이찌(酒井好一)과 노무라 미쓰마사(野村光政)으로부터 380원의 기부금을 받아 사용하였다.
이 조선치과의사회는 일본인 치과의사가 주동한 일본인 치과의사를 위한 조직이었다. 조선치과의사회의 조직은 회장, 부회장, 이사, 평의원, 지방위원 제도가 있었는데, 회장을 비롯한 거의 모든 임원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장은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이이다 데쓰(飯塚徹)·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소토 케이죠(外圭三)·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역임하였다. 초대회장은 楢崎東陽였으나 1개월 후에 사임하고 利根川淸治郞가 부회장으로 회장을 대리했다. 1922년 10월 총회에서 飯塚徹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1924년 6월 사임함에 따라 다시 利根川淸治郞가 부회장으로 회장을 대리했다. 1924년 10월 총회에서 利根川淸治郞가 회장이 되었고, 1926년 10월 총회에서는 外圭三이 회장이 되었다. 1928년 10월 총회에서 利根川淸治郞가 다시 회장이 되어 3회 연속으로 연임하였다. 1934년 大澤義誠, 1944년 柳樂達見가 회장을 맡았다.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조선치과의사회에 가입했으나 소외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한국인 치과의사 임원으로 설립 후 10년이 지난 1930년 김연권(金然權)이 이사로, 이성모(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