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봉착해 있는 어려움에도
아직은 일할 수 있고
나에겐 최선의 치료를 기대하는…
개원 치과의사의 일상이란게 어느 정도 개원 연차가 지나면 결국 평이하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많은 선후배들이 자신의 다른 재주를 계발하고 멋지게 사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하고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필자도 칼라는 다르지만 역시 그리 평범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1991년 치의국시 합격률 최저치를 기록하던 해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이를 계기로 힘을 모아 활동하여 국시제도의 문제점과 그 당시 국시 출제의 일부 무리함을 증명해 내고 국시제도를 개선시키는데 일조를 해냈다.
이 과정에는 치협 항의방문, 국립보건원 기습방문및 일부 성적공개, 보건복지부(당시) 항의 방문, 국회 청원서 제출, 국회 본회의 중 브리핑, 행정소송(3년후에 종결), 학생들 및 수련의 항의 집회 수차례 등 전국학장회의에서도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 일들을 자치모임(91치의국! 시비상대책위원회)으로 해낸 기억이 난다. 책상과 실험실 그리고 대학병원내에서 겨우 세상을 바라보았던 필자는 그 일로 친구도 많이 얻게 되고 입법, 사법, 행정기관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사회경험도 하게 되었다. 큰 일간지 사회면을 비롯한 저녁 7시, 9시뉴스에 나오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행정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그 다음해 국시에서 합격, 공보의로 배치받은 후 1년이란 세월의 아쉬움 때문인지 시골 오지였으나 구강보건사업을 왕성히 하는 의욕을 가져보았고 공보의 2년차에는 군건소로 자릴 옮겨 6.9제 행사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기에 건치아동 선발, 구강관리우수학교 표창, 가두캠페인, 표어 포스터 공모전, 구강 보건의 날 행사및 양로원 봉사활동 등 굵직하고 의미있는 행사를 치러내어 공보의의 위상을 세워보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공보의협의회를 주축으로 구강보건사업단이 결성되는 등 공공의료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리매김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동분서주하였다. 예비 공보의 직무교육을 위탁받아 해낸 것도 이때의 일이다.
영세하여 보건소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진료외에도 구강보건교육 강의를 수없이 다니고 노력한 결과일까? 지역 어른들이 지역 개원을 권유하고 또 그리 나쁘지 않아 자릴 잡은 게 벌써 개원 10년째가 되었다. 그때 당시 전국 최초 야간진료(화요일)를 시행하였다. 개원 2년만에 공동개원 및 프랜차이즈 병원을 꿈꾸고 뜻맞아 보이는 사람들과 같이 의욕만 가지고 일을 벌이다가 빗나가 사람과 물질을 잃기도 하였다. 그 일이 지금도 수습이 안돼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그 어려움 가운데도 더 겸손해져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다니고 더 공부할 기회도 갖고 현실과 법에 대한 개념도 세우고 이제는 낭비한 세월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계획하여 실천하고 있다. 그런 탓일까? 전부는 아니지만 떠나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고 나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내가 내 문제로 허덕이는 삶을 살며 소원하였던 오래전 동료들과 마음을 나누었던 선후배들에게 대한 미안함과 보고픔이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온다.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나의 삶의 낭비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다. 마라톤 하는 선수가 가벼운 차림을 하듯이 수영선수가 물살의 저항을 최소로 하기위해 가벼운 소재의 옷을 찾듯이 우리의 삶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는 문을 찾게 해준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처음 유치를 발치하던 느낌, 처음 근관치료를 하던 느낌, 처음 씸플 크라운 하던 느낌, 처음 틀니하던 느낌, 처음 레이저 치료하던 느낌, 처음 임프란트하던 느낌이 시들해져간다고 생각되는 개원 10년째의 오늘 이 글을 쓰며 난 나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떠올리며 잠시 가벼운 신선함을 마음껏 빨아들인다.
수많은 어려움과 현재 봉착해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일할 수 있고 나에게 최선의 치료를 기대하는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