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가지는 과 의국 증례발표에서 치료계획에 대한 토론이 벌어질 때가 있다.
물론 보존과 내에서 하는 증례이니만큼 대부분이 이러저러한 치료를 어떻게 해서 성공적으로 살릴 수 있었다라는 내용들이다. 그 중의 일부는 소위 heroic dentistry라고 할 정도로 무리한 시도를 한 경우도 있다.
가끔씩 외부 인사들이 참관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특정 경우의 치료계획에 대해 치료의 보편성과 효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 만한 노력과 위험부담을 안고 꼭 치료를 시도할 필요가 있겠냐 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에 대해 나는 우리 전공의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면허를 가진 의사라면 어떠한 치료계획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다만 그러한 치료계획이 논리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당신은 왜 그런 치료를 선택 했느냐고 할 때 누구의 보고나 책에 의하면 어땠다든지, 아니면 나는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그러한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했다든지 등의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결과가 바람직하지 못하게 나왔더라도 책망할 수는 없다고 본다.
모든 치료에는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다. 얼마나 조금 잃고 많이 얻느냐가 치료방법을 선택하는 기본이기 때문에 사람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치료계획이란 있을 수가 없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러한 치료의 선택이 얼마나 환자에게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장 근관치료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치아라 하더라도 그 환자가 근관치료를 받을 만큼 전신건강이 좋지 않거나 말기질환에 의한 쇠약 상태라면 근관치료를 전문하는 사람들이 금기시 하는 pulpotomy도 그 환자의 남은 여생을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임프란트와 관련되어 제자들로부터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발치의 기준이 너무 이완되고 있다는 것이다.
발치의 기준이 무엇인가? 치근단병소가 어떻고 치주질환이 어떻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한 기준은 이미 교과서에 다 나와 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준은 환자에게 과연 무엇이 도움이 되겠는가 일것이고 그러한 기준은 “이 치아가 내 ‘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에서 찾으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이승종 연세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