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프란트의 등장은 치과치료의 패러다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실로 쓰나미같은 지각변동을 일으켜서 치과 전문지 어디를 펼쳐도 임프란트 기사를 볼 수 있을 정도이고, 학술대회나 세미나도 이것을 빼놓으면 김빠진 맥주마냥 찾는 이가 없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치과산업이나 경영에서도 예외는 아닌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총아임에 틀림없다.
사실 그간 의치로 많은 고생을 해온 환자분들에게는 복음과 같은 것이다. 갈비를 힘차게 한 입 베어 물고 맛있게 씹으면서 “아~ 살 맛 난다”라는 TV 치주치료제 광고처럼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맛나는 세상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도 적응증에 맞게 잘 쓰지 않거나 남용하면 탈이 난다. 임프란트는 잃어버린 자연치아 회복의 훌륭한 대안임에는 틀림없으나, 병든 자연치아 회복의 ‘0순위’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요즘 임프란트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웬만큼 늙고 병든 자연치아들은 아주 과감히 버리고 야무진 인공치아로 대체하는 도전적인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치주염이나 근단병소로 골골하는 자연치아는 장기적으로는 예후가 안 좋으니 차라리 발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다른 더 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판단이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의 문제는 따져 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이나 내 가족의 치아라도 똑같은 결정을 과감히 내렸을까? 치주전문가나 근관치료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치료가 될 수 있는 정도이지만 자신이 능력이나 판단으로 볼 때는 발치 밖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성을 잃은 주관적 판단일 수 있다.
물론 병원 내에서 판단의 주체는 그 의사에게 있다. 그렇다면 환자의 운명은 ‘오늘의 운세’에 달렸는가? 의학은 과학이다. 과학의 근간은 객관성에 있다. 자신의 능력을 좀 더 업그레이드시켜서 병든 자연치아를 살려내는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보람은 사실 그 무엇에다 비교할 수가 없다. 임프란트 시술을 위해 쏟는 열정의 반만이라도 치주나 보존치료에 할애한다면 지금의 주관적 판단이 많이 객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장기적으로 볼 때 치주치료는 예후가 나쁘기 때문에 치조골이 더 이상 파괴되면 그나마 임프란트도 못할 형편이 돼 더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치주치료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치주치료는 원 샷으로 끝나는 치료가 아니다. 구강 내의 수많은 세균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안은 언제나 재발이 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기적 치주관리가 기본인 것이다. 왜 임프란트는 시술 후에도 임프란트주위염의 발생을 막기 위해 정기검진의 중요성을 당연한 것으로 강조하는가? 치주치료도 그 정성을 갖고 관리를 잘 해주면 더 이상의 치조골 파괴 없이 유지관리가 되는데도 왜 비관적으로만 생각할까? 돈이 안 되기 때문인가? 예후가 안 좋다고 발치한다는 논리라면, ‘인간은 언젠가는 예후가 나빠져서 모두 죽는데 아프면 꼭 치료를 받아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까?’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며칠 전 많은 임프란트를 한 어떤 환자가 치료를 끝내고서는 “선생님 , 저 로봇인간이 돼가는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씹는 기능은 훌륭하게 회복해서 ‘ 아~ 살 맛 난다’가 됐는데, 심리적으로는 뭔가 아픔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갖고 있던 많은 치아가 이제 늙고 병들어서 하나 둘씩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이제는 늙었구나, 어느새 인생의 내리막길에 서 있구나 하는 무상함이 엿보였다. 젊어서 치아가 나빠 많이 빼고 고생을 한 후부터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고 어느 강연에서 말씀하셨던 고 서정주 시인의 생각이 난다.
서영수 자연치아아끼기운동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