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치과를 찾는 환자들도 하루가 다르게 그 수가 줄어들었다. 결국 K원장은 그 곳에서 개원을 접고 또 다른 경기도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에서는 더 이상 환자들이 물어도 출신대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집요한 환자에게는 국내 대학원에서 받은 보건대학원 석사학위로 답을 대신하곤 했다. 스탭들에게도 그렇게 답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이번엔 주위의 일부 동료 치과의사들과의 관계에서 출신대학이 애로로 작용했다. 지역 치과의사회 모임에 나가서도 쉽게 국내치대 출신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K원장이 다가가면 이내 수군거리던 대화는 가라앉곤 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 치과의사회 모임에 나가기가 꺼려졌고, 지역 치과의사 동료들로부터 소위 ‘왕따’를 맛보았다. 환자들도 과잉진료 운운하며 출신대학에 대해 다시 들먹이기 시작했다. K원장은 그동안 개원비용으로 들어간 빚만 수억을 안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도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고민을 어디 하소연 할 때도 없다. 찾아갈 마땅한 선배도 없다. 외국치대 출신 상당수가 외부에 알려지기를 꺼려해 선배와 후배간의 왕래도 쉽지 않다. K원장은 마음같아선 치과를 과감히 접고 싶지만 집에서 자신을 믿고 있는 아내와 초등학교 아들녀석, 어린 딸이 자꾸 눈에 밟힌다.
외국치대 출신들이 국내면허를 취득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에 필리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면허를 취득한 P원장은 현재까지 치의학대학원을 포함한 보건대학원, 경영학, 인문학 등 석·박사 학위만도 대여섯에 이른다.
P원장이 학위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배움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난 80년대 후반에 처음 개원할 당시 주위 일부 치과의사들에게 들은 핀잔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 P원장은 “당신이 무슨 의사냐... 국내서 제대로 공부하고 개원하라”는 핀잔성 충고를 자주 듣곤 했다. 심지어 당시 어떤 의사는 이 지역에서 개원하지 말 것을 강요받기도 했다고 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외국치대 출신 치과의사들도 많고, 외국치대 출신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개선돼 과거처럼 심하게 대하진 않지만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만해도 개원 전에 주위 의사들의 눈치부터 봤다”고 했다.
한번은 환자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바로 옆 치과 출입문 앞에 대자보가 붙었다. “○○치과 원장은 후진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의료 질을 신뢰하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화가 나 지역 치과의사회에 문의해 해당 원장으로부터 사과는 받았으나 석연치 않았다. 결국 P원장은 그 곳을 떠났다.
심지어 P원장이 개원 후 스탭들을 모집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애를 먹었다. 어렵게 구한 한 스탭이 그랬다. “스탭들조차도 원장의 출신대학을 알아보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외국치대 출신들의 경우 과잉진료를 많이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 스탭들이 환자에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요즘도 스탭들 중에는 원장의 출신대학을 뒤늦게 알고 난 후 치과를 떠나는 스탭들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이제는 스탭 구하는 일이 일상화 됐다고 했다.
P원장은 최근에는 진료 틈틈이 법학대학원에서도 공부하고 있다. 몇 년전 본의 아니게 환자와의 의료분쟁이 발생해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법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이에 대해 상의할 선, 후배는 물론 동료 의사들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환자가 요구하는 대로 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제는 국내 대학도 나올 만큼 나왔지만 아직도 마음 한편에는 허전하다”고 했다. “작년부터 예비시험제가 도입돼 앞으로 후배도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다. 국내와 다른 언어와 환경, 들어간 비용 등 외국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국내에 돌아와 다시 힘들게 개원해야 하는 환경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신경철 기자 skc0581@k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