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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40 역대 편집인 특별좌담]40돌 맞은 치의신보 괄목상대 "감회"

관리자 기자  2006.12.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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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 이원균 편집인

 

참석자 명단 :
강준설 전 공보이사
김의배 전 공보이사
최원덕 전 공보이사
최상묵 전 공보이사
이기택 전 공보이사
양영태 전 공보이사
변영남 전 공보이사
김지학 전 공보이사
송요선 전 공보이사

 

제3대 치의신보 편집인을 역임한 강준설 전 공보이사를 비롯한 역대 편집인들의 치의신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여전했다. 당시 편집인으로 역동적인 활동을 통해 치의신보의 발전을 이끌어온 열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날 좌담회에서 역대 편집인들은 창간 40주년을 맞는 치의신보의 발전을 축하하는 한편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더 많은 노력을 통해 ‘읽히는 신문, 회원을 위한 신문’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편집자 주>

 

40돌 맞은 치의신보 괄목상대 ‘감회’
‘회원 위한 읽히는 신문’ 거듭 주문
기관지 태생적 한계 특성화로 승부
진료봉사 등 다양한 회원 소식 담아야
객관적 기사 싣는 ‘용감한 신문’ 돼야
치의 위상 대국민 ‘홍보의 장’ 바람
신문·경영 두 톱니바퀴 잘 맞아야 발전
오자 등 지면 완성도 세심한 노력 당부

 


▶사회 : 치의신보 창간 40주년을 맞아 치의신보 발전을 견인해 오신 역대 편집인들을 모시고 특별좌담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편집인을 맡고 계실 당시 치의신보 변화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강준설 : ‘칫과월보’로 시작한 치의신보가 벌써 40년이 됐다니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자리에 나와 역대 공보이사들을 만나게 되니 치과계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된 것을 느끼면서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공보이사를 역임할 때는 한 것이 많지 않았다. 후배들이 잘해줘서 치과계가 이만큼 발전했다.


김의배 : 요새 치의신보는 너무 잘 하고 있다. 당시 편집인을 역임할 때 한달에 두 번 나오면 많이 나왔는데 한번하기도 힘들어 4페이지정도 밖에 제작하지 못했다. 그때는 광고료가 없어 자원과 재정이 어려웠었다. 당시 서영규 회장이 일본을 통해 받은 자원으로 했다. 당시 기자가 1명 있었다. 당시에는 사설도 없었고 내용도 빈약했다. 당시 회원이 3000여명밖에 안될정도여서 상당히 어려웠다.


최원덕 : 칫과월보에서 치의신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짧게 편집인을 역임했다. 기자를 처음으로 채용한 것 같다. 독립채산제는 아직 안됐고 추진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변영남 : 양영태 공보이사 때부터 일부 독립하다 제 때에 와서 치의신보의 독립채산제가 완전히 됐다.


양영태 : 윤흥렬 집행부의 개혁적 마인드가 강했다. 워크숍을 통해 공보위원회에서 제시한 내용이 그 때까지 (치의신보 재정을)협회비에서 일괄하고 있었는데 독립채산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회원들은 독립채산제가 어려울 것으로 우려, 무리하면서 하지말고 단계적으로 하자며 독립채산제를 반대했다. 예산은 협회서 책정돼 있었으나 금액이 오버돼 있어 6개월 뒤 플러스가 되면서 독립채산제를 최초로 실시한 것이다.
대학 학보사 기자와 신문대학원을 나온 저에게 윤 회장이 특별히 오더를 준 것이 치의신보의 개혁이었다. 치의신보를 회원들을 위한 신문, 회원권익을 위한 신문을 만들도록 전권을 주겠다고 했다. 사실상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저는 기자들의 활성화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치의신보를 근본적으로 발전시키는 동력이 기자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 이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이기택 : 치의신보가 40주년이라는게 나한테는 조금 놀랍다. 40년동안 굉장히 발전한 게 사실이다. 치의신보의 발전을 10년 주기로 생각하면 치의신보가 바뀌는 큰 획은 성수동으로 옮겨 오면서다.
그 다음은 전면 가로쓰기하면서 한단계 더 발전했다. 그리고 치의신보가 독립채산제를 하면서 광고가 부족했지만 광고의 도움으로 독립채산제로 하면서 협회서 분리할 수 있는 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