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가 직접 나서
바로잡는 노력 필요할때”
문화의 세기가 온다며 한동안 축제가 유행하였다. 선거를 의식한 단체장들까지 가세하여, 국제영화제니 꽃박람회니 도자기축제니 나라 전체가 갑자기 문화로 도배를 하였다. 언제부터 이 나라 위정자들이 그렇게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자고 일어나면 벚꽃과 도자기와 심지어 자장면에 축제란 글자가 붙어 벚꽃축제와 도자기축제와 자장면축제로 변신했다. 결국 지역마다 문화의 이름으로 온갖 이벤트와 이벤트사가 만발하게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흥행과 이윤을 좇는 속성에 따라, 문화예술은 일단 돈이 된다 싶으면 상품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화가 상품화되면 그 중요한 본질의 하나를 보통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된 바는 아니었겠지만 예를 들어 사물놀이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놀이가 갖고 있던 본래의 본질인 공동체 내의 화해를 통한 통합 즉 배우와 관객의 어우러짐을 잃어버리게 된다.
원래 우리 전통문화마당의 본질은 마을 구성원들간의 통합이나 화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풍물로 한바탕 어우러지고 나면 마을 사람들의 온갖 높낮이와 응어리가 나름대로 정화되었다. 사실 길놀이나 대동놀이의 마지막은 배우나 관객이 한데 어우러져 마침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었지만, 마당이 아니라 무대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의 상업적인 공연 과정을 거치면서 끝 부분의 중요한 본질이 슬며시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관객은 무대 위를 바라다만 보게되었고 배우는 공연만 하게 되었다.
따라서 참가해서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바라보는 것에 우리는 점차 익숙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문화가 본래 갖고 있던 사회통합적인 본질이 일상생활에서 떨어져나가게 된 전모이다. 이리하여 논두렁에서 두레질과 막걸리로 자연스레 일과 놀이의 합치로서 이루어지던 일상적인 축제가 이제는 시골구석까지 관과 기획사에 의해 거창한 이름의 인위적인 축제로 변질되었다.
이와 같은 본질의 왜곡 현상은 문화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의료계에서도 나타난다. 언제부턴가 애를 받지 않는 동네 산부인과가 슬금슬금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 수가 아예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애를 낳는 산부인과의 본질은 사라지고 본말이 전도된 산후조리원에 최고의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피부과의 기존 질환보다는 피부미용관리로 더 이윤을 챙기고, 서울대학에서조차 외과수련의 지원자가 미달되고, 의원 간판의 한 모퉁이에 성형외과가 진료과목으로 적혀있는 곳이 한 둘이 아니다. 여인숙비만도 못한 의료보험수가나 의료사고의 위험성, 또 의사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으로 증가된 소송 등을 그 이유로 들지만, 무엇보다 돈이 첫 번째 이유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문화에서처럼 의료에 있어서도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병과 아픔으로부터 환자를 해방시키고 생명을 존중하는 의료의 본질이 돈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이것은 상업주의란 시대적 상황이 만든 사회적인 병인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의 의료인에 대한 사회적 신분과 대우는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거나 오지에서도 의료의 본질을 구사했던 슈바이처와 같은 선구적 의료인들의 희생과 봉사에 절대적으로 빚진 바 있으며, 또한 그에 따른 시민사회적 합의에 의한 역사적 결과물인 것이다. 바로 그 열매는 의료가 본질에 충실하였을 때 열린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도 결국은 의료의 대상인 환자일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자각하고, 왜곡된 의료의 본질을 바로 잡는 노력이 의료계의 일각에서 벌어져야 할 때이다. 그것은 위험성과 난이도에 따른 정당한 의료수가 체계 확립, 상업화를 넘어선 대체 의학 연구, 의료본질에 충실한 의료 윤리의 확립 등일 것이며, 의료복지가 사회복지의 하나임을 감안할 때 이는 바로 의료 NGO가 할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