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제24회 EAO에 이어 아주 특별한 행사가 하나 더 개최되었다. 피 아이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골유착에 대한 그의 연구를 기억하고 계승하며 임상적으로는 가능한 많은 환자를 진료해 이들에게 더 좋은 삶의 질을 베풀어 주고자하는 그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추모 심포지엄이 조용한 일요일 카로린스카 인스티튜트에서 개최되었다.
20명의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연구자, 과학자, 임상가들이 선정돼 피 아이의 생애와 업적과 최근 연구내용에 관한 식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 모임은 밴 스틴버그 교수가 브로네마르크 교수의 부인과 협의해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피 아이가 작고했을 때에도 공개 장례식을 마다했던 부인이 밴 스틴버그 교수의 설득에 의해 이런 특별한 기념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부인은 그간 세계각지를 따라 다니며 그의 수술을 도왔고 말년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그의 휠체어를 밀어준 사람이다.
심포지엄 전날 밤, 그랜드호텔 추모 만찬장에서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 몸이 불편한 부인이 연단에 올라와 당신이 이 자리에 우리와 지금 함께하고 있음을 믿는다고 조용히 절규하며 그의 혼을 부르는 내용의 인사말로 개회했다.
고미야마는 새로운 개념으로 세계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고, 그러면서도 브로네마르크 교수는 유머가 있고 인간성을 갖춘 학자였다고 말했다.
더블린에서 온 Harris는 식후 낭독한 추모사에서 피 아이는 진정한 천재학자이면서도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그는 피 아이의 배후에서 연구를 도운 숨은 협력자 두 사람을 지적했다. 한 사람은 새로운 재료를 다룰 줄 알고 수술기구와 임플란트를 실제로 제작해준 발틱해의 난민인 쿠이카와 또 다른 숨은 협력자이고 친구인 스칼락 교수를 상기시켰고 골유착의 긴 여행에 이어 이젠 편히 쉬라는 말로 추모사를 끝맺음했다.내가 지금 인쇄중인 출판물에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썼는데 증언 같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테이블에 앉아있던 대학 동창생 룬드보리 교수는 피 아이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1949년 피 아이가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6개월간 그는 시골 초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 있던 농장이 너무 아름다워 매료된 나머지 원 이름은 Perssen이었는데 그 농장의 이름을 따 Branemark라고 성씨를 개명했다는 것이다. 브로네마르크 교수가 사망한 소식을 듣고 지금은 70, 80세가 다 된 당시 학생들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로 그가 얼마나 감성과 낭만이 곁들인 사람이었는지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한다.
전야제에 참가했던 낯익은 브로네마르크 연구팀원들도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50년의 세월이 길어서인지 머리카락색이 다소 바뀌었고 얼굴에는 노색이 은근하게 드려있었다.
그리고 초청 가수들의 분위기에 맞는 추모곡을 듣고 폐회된 후 그 다음날 카로린스카 대학에서 특별한 심포지엄이 진행되었다.
심포지엄의 내용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피 아이가 혈류학을 연구한 것은 1950년대 룬두대학에서부터였고 골유착학을 연구한 것은 62년 부터였는데 처음 50%성공의 초기연구에서 초미세구조의 수준에 이르기까지를 알브렉숀이 발표했다.
Eriksson은 Boston 테러사고 때 한 피해자의 안면전체 이식 수술하면서 피 아이의 미세혈관 순환에서 얻은 지식에 자극을 받아 성공한 이야기를 전했다.
Jemt와 Friberg는 기계 절삭면 임플란트를 비소독상태로 공급하던 시기에서 Nobelactive에 이르는 골유착의 다양한 적용을 순차적으로 보고했고 2014년까지 4만개를 시술한 데이터가 누적되었음을 알려주었다.
Rydevik은 사지보철에 임플란트와 전자기구를 활용해 감각도 느끼고 동작도 할 수 있는 새로운 기전에까지 이르게 된 점, Lundborg는 임플란트로 관절기능과 감각기능 회복이 뇌 해당부위 활성화로 진정한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증명, Tjellstrom은 골 전도성 보청기를 시술해 94%의 성공을 이룬 것과 또 다시 개발된 새로운 기전을 소개, Perel은 82년 최초로 San Antonio에 악안면 센터를 세운 일, Malevez는 97년부터 zygomatic implant로 즉시 하중을 적용해 97.5% 성공한 이야기, Bergstrom은 인공 안면보철물 제작시 기초 조직면의 중요성, Higuchi 는 혁명적인 즉시 하중 법의 시작으로 개발되었던 Novum은 미래의 가이드가 됐다고 했다.
이 Novum은 소수의 임플란트, 저비용, 즉시, 그리고 당일 수술 및 영구 보철물의 완성 등의 이점은 환자의 이득을 먼저 생각한데서 발상된 것이라고 했다. Laube는 관련 기업과 건강에 대한 임상적평가의 창조적인 연결, 창조적인 아이디어, 기업과의 협동, 두려움 없이 결정할 수 있는 리더십, 꾸준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van Steenverghe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치과의사들은 papilla 같은 작은데에만 신경을 쓴다고 언짢아했다. Osseointegration을 넓게 보라는 것이다. 그는 MD이기 때문에 신체 전반에 걸친 골유착을 보라는 것. 그런 관점에서 이번 프로그램은 신체전반에 적용된 의학적 응용이 대부분이었다.브로네마르크 교수가 이룬 골유착성 임플란트학은 신체에 어디에든 적용이 가능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래도 가장 큰 성공은 거둔 분야는 결손치아를 수복하는 치과 보철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브로네마르크 교수도 생전에 이를 인정했었다.
모든 참가자에게는 그의 일생의 하이라이트가 정리된 1x3미터 크기의 대형 포스터가 기념품으로 주어졌다. 그 포스터에는 1952년 노벨상을 꿈꾸며 혈류학을 연구하던 젊은 연구자의 모습, 생체연구실 환경, 1965년 최초로 시술받은 환자, 그 환자는 40년 후 사망했지만 그에게 이야기를 들은 택시 운전기사도 치료를 받고 50년 가까이 사용 중인 환자 모습, 초기 임플란트 시제품을 포함한 수술기구, 1977년 기초임상교육과정을 시작한일, 1979년 토론토에서 국제교육과정을 시행했고 1982년 텍스트를 출판했고, ADA가 어떠한 임플란트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최초로 사용가능한 임플란트로 잠정 승인한 일, 1990년대에 구강외 임플란트로 악안면을 수복한 일, 골유착성 보청기, 관절수복, 2000년 Zygoma 및 Novum 임플란트의 개발, 1992년 브라질에 비영리 Branemark center를 세우고 공헌한 일, 그리고 호주의 한 농장에서 예리한 막대기에 가슴을 찔린 개를 마취도 못하고 달래면서 보통 바늘로 꿰매 응급지혈한 일화로 그의 인도주의적 면을 표현한 그때 그 개의 사진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학력 경력 수상 기록을 정리한 내용도 담고 있었다. 본문은 지면관계로 가장 짧게 브로네마르크 교수의 추모행사 내용을 요약한 글이어서 표현이 충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