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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우의 문화NGO칼럼>
가치의 다양화와 정치적 선택

관리자 기자  2002.12.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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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문화·경제 등 사회적 가치의 정치적 가치 획일화 풍토 사라져야 농대 나온 친구들이 몇 있다. 학창시절 집 뜰에 토종 잔디를 심어주며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이라고 자랑하던 한 친구는 원예과를 나와 작은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고, 또 한 친구는 다니던 은행이 퇴출되었지만 아직은 인수 은행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축산과에 다니던 친구는 미국에서 10년쯤 공부하다 돌아와선 축산회사에 다니다 부도가 나 천신만고 끝에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농대를 나온 친구들을 보면 우선 서글퍼진다. 어찌된 셈인지 호기 있던 재목들 중 지금 임업연구소나 원예연구소나 종묘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하나 없고, 여기 저기 은행이다, 사업이다, 뿔뿔이 밥 먹을 데를 찾아 헤매다 이제 퇴직할 날을 기다리는 나이들이 되었다. 어찌 이 나라에는 후학들이 밥 벌어먹으면서 마음놓고 연구할만한 연구소 하나 없는가. IMF로 한국의 종묘회사가 거의 외국에 넘어가고, 장미꽃 하나도 외국에 로얄티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이제 재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땅에 맞는 벼와 밀 등의 농산물 종자를 전부 외국에서 가져다 써야 한다니, 정자도 없는 한국 사람이 입양아를 키우는 꼴이다. 근 20년 동안 기초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적 토대 등 미래를 준비할 기본적인 토대가 특히 비정치권역에서 축적되질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정치적인 경도 때문이다. 학문적 가치, 문화적 가치, 심지어는 경제적 가치조차도 정치적 가치로 획일화되는 풍토로 인하여, 다양한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와해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도 기초과학에 빠져 있는 과학자 그룹이 있었기에 소련의 우주항공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예술이 살아남은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요동을 쳐도, 세상모르고 자기 일에 빠져있는 그룹들이 바로 기초적인 토대인 것이다. 교육에서도, 스포츠에서도, 의학에서도, 농업에서도 그런 것들은 꼭 필요한 것이다. 불행한 정치적 격동기로 인해 많은 운동권들이 추후 정치 세력의 배후나 전면처럼 비쳐지고 교육계가 전교조와 아닌 그룹으로 대별되는 듯한 것은 옆으로 비껴서진 제3그룹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타까운 일이었다. 반드시 정치적인 포부와 연관지어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IOC의원인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갖고, 또 건강한 재벌인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고 본인과 또 남들도 느끼는 그런 그룹의 토대가 모두 망가져 버리고, 모두다 정치로 일원화되어 하나의 편향된 가치 체계를 갖게 된 것이 바로 정치인들의 술수에 넘어간 우리 세대 최대의 실수인 것이다. 바로 보자면, 현실정치로 입문한 운동권보다는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간 운동권이 더 많았으며, 명동 거리를 메웠던 6월 항쟁의 넥타이 부대들 대부분은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운동은 바로 점심시간 후 잠깐의 오수와 햇살을 받으며 한가롭게 걷는 일상적 가치를 얻기 위한 운동이었다. 사실 정치적 가치는 물론이고 경제적 가치, 문화적 가치도 그 근원은 일상적인 삶의 가치에서 빚어지고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치는 어쩌면 추위에 떨고 있는 한 노숙자의 생명에 담겨있는 인간적 가치를 향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 아래 이 땅이 굳건한 것은 다름 아니라, 정치적 부화뇌동 없이 말없이 자기 일의 농토를 가꾸고 있는 사람들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인간적 가치의 무게 때문인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참신한 신인들의 진입과 진보 정당의 존립이 어렵고 기성정치인들의 자체 정화도 힘든 현 정치 상황에서, 최선이 없으니 차선이라도 뽑자는 논리를 따르자니 결국 기성정치인 중에서만 뽑게 되어 기존제도권을 굳혀주고 말고, 그러니 한 표의 힘을 적극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제도권을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마음을 달래보지만, 가슴 한편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몇 번의 선거를 치를 때마다, 우리는 신물이 난 정치권에서 차선이나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뽑힌 정치인들은 또 구습과 구악을 재현했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사회개혁을 위해서 정치만이 만능이며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이라는 그들의 강변을 믿은 데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지엽적으로는, 거부하는 방법도, 무시하는 방법도, 기권하는 방법도, 오직 제 할 일만 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지체된 민주화의 여정을 보더라도, 이제쯤은 제 일 하나 열심히 하는 것도 정당한 사회적 평가를 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말없는 거부 표시인 낮은 투표참가율을 국민의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였던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노·정 단일화 승복에 관한 뉴스는 이제 정치인들도 국민의 진저리를 염두에 두고 페어플레이에 임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