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殺生簿, black list)

  • 등록 2021.08.27 1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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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여년 쯤 전에 인기가 있었던 ‘데스노트’라는 일본 만화가 있었다. 만화의 제목이자 작품의 주제를 상징하는 ‘데스노트’는 천상의 사신들이 인간들을 죽일 때 사용하는 공책으로, 사람의 이름을 그 노트에 적으면 그는 명을 다하여 죽게 된다. 인간계에 떨어진 이 노트를 라이토가 우연히 줍게 되고 이것이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란 걸 알게 된 그는 이 노트를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기로 하고 온 세계의 범죄자들의 이름을 써서 죽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많은 범죄자들이 죽는 사이에 이상한 연관성을 발견하고 파해치는 경찰이 생겼는데 점점 추격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라이토는 뒤쫓는 경찰의 이름마저 그 노트에 기록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처음에 자신이 그 노트를 왜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잊어버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지 못하며 점점 더 변질되어간다. 본인이 모든 것에서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려는 것을 막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내는 그 어떤 대상도 제거해버리는 괴물로 되어버린 것이다. 정의감이 넘치는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나아가다가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1990년 2월 졸업식장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교수님들 앞에서 외치면서 치과의사가 된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처음 치과대학에 입학했을 때에 그렇게 연로(?)해 보이던 선배님들의 그 당시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10~20년 아래일 때라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 그 당시에 선배님들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들로 보였는데 말이다. 분당에서 아이들의 진료를 위한 병원을 시작해온 기간이 짧지 않다보니 일상의 진료 외에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은 아무래도 보호자 분들의 크고 작은 컴플레인이었다(아마도 다른 치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한다). 예약된 시간에 맞춰 왔는데 대기시간이 길다고 불평하시는 경우는 소소한 일이고, 마취 후 주의사항을 그렇게 신신당부하면서 설명드렸으나 아이가 집에서 씹고 입술이 처참하게 퉁퉁 부어버리면 치료할 때 드릴로 그렇게 다치게 했다고 우기시는 답답한 상황도 곧잘 생겼었다. 그런 경우를 반복해서 겪다보니 진료팀 안에서 굳이 서로 언급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블랙리스트’가 저절로 만들어졌다. 그 리스트에 올라있는 환자(보호자)는 우리 의료진에게 소위 진상이라고 평가되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나의 마음속에 그 리스트가 그 만화속의 ‘데스노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우리 병원을 좋아하고 다른 환자를 소개하면서 예약시간도 잘 지키는 좋은 환자는 살리고, 원하는대로 따라오지 않거나 제멋대로 내원을 잘 안 하고 캔슬, 노쇼, 컴플레인이 많은 환자는 다른 선량한 환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악한 존재로 규정하면서 색안경을 끼고 어떻게 하면 아웃을 시킬까 하면서 리스트를 관리하는 바로 그 ‘데스노트!’ 내가 모든 환자들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합리화(?)를 하면서 환자를 가려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최근 코로나 시기에 예약된 날짜에 연거푸 예약을 옮기고, 못 오고를 반복하다 수 개월만에 내원한 아이들이 있었다. 오전 진료 시작하기 전, 스텝 미팅에서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요주의 환자이니 감안해서 보자’라고 이야기 되었었는데, 내원해서 보호자 분께서 전해주시는 사연을 들으니 마음이 짠했다. 얼마나 가족 모두 마음이 힘들었을까 하고. 큰 아이가 코로나 확진이 되어서 격리상태에 들어갔다가 이어서 가족들이 줄줄이 확진되는 바람에 거의 두어 달을 격리상태와 해제를 반복하면서 지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한,두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보이는 환자라 하더라도 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예 낙인을 찍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을까. 설령 그러한 안타까운 사연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개념없는 환자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어느 집에서 귀한 가족의 일원임에는 분명하므로.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환자가 늦을 때마다 짜증이 나고 불쾌하게 된다면, 그 환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그러할텐데 괜히 나만 그 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정말로 시간관념이 없어서 습관적으로 지각, 노쇼 등을 하는 환자가 있다면 데스노트에 기록해서 살생부의 개념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림으로써 이제 더이상 우리병원의 환자가 아니기를 바라지 말고, ‘습관적 지각’이라는 인수를 상황 방정식에 넣어서 답이 나올 수 있도록 미리 대비만 하면 서로가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환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더라도, 내가 어떤 특정 환자를 배척하는 일은 없기를 소망해본다. 환자도 병원도 항상 훈훈한 상호 이해와 배려를 통해서 관계가 아름다워지고, 치과생활이 더욱 즐겁고 보람 있어서 은퇴는 당연히 미룰 수 있으면 최대로 미루어 나이 80~90세 까지도 현역으로 진료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며 빙긋이 미소지어 본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승준 분당예치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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