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2022.09.28 15:5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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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제일 맛있게, 그리고 질리게 먹었던 도시락 반찬은

장조림과 멸치였습니다.

한 품으로 안기도 힘들만큼 커다랗고 노란 자루봉투에는

마른 멸치가 꽉꽉 채워져 있었는데,

볶음용 멸치건 육수용 멸치건 쓴 맛을 없애기 위해서는

검은 내장을 일일이 잘 발라내야 되서,

바닥에 신문을 깔고 온 식구가 한나절 이상을 매달려야 했습니다.

 

빙 둘러 앉아 도란도란 시작했던 멸치 까기는

공부, 졸음, 귀찮음을 핑계로 한 형제들의 이탈로,

결국 엄마와 나 두 사람이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반다리로 시작하여 엎드린 자세로 바꿔가면서

몇 시간씩 참을성 있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이제 그만 들어가 쉬라는 말씀에도

끝까지 엄마와 함께 비릿한 멸치를 다듬었습니다.

 

10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작지만 예쁘고, 사려 깊고, 총명하셨지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셨지만, 숫자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셨으며,

상황 판단이 합리적이고 활동력이 강해서

친척들 행사나 동네 대소사 모임을 우리 집에서 주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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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포대의 그 많은 멸치를 까는 동안 엄마와 나누었을 대화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랜 입원 생활, 정신을 놓고 메말라 가면서

마침내 멸치처럼 앙상해지셨을 때,

자식이 옆에 있어도 못 알아보시는 모습이 서러워

당신 귀에 대고 넌지시 속삭입니다.

 

“엄마 셋째 왔어. 멸치 까던 때 생각나? 우리 둘이 몇 포대씩 다듬었잖아.

엄마 사랑해요.”

씨익 씨익 간신히 숨만 내뱉는 벌어진 입술과

굳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광대만 두드러진 얼굴에

가슴이 메입니다.

잠시,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습니다.

 

 

 

 

 

 

 

 

한진규

치협 공보이사

한진규 치협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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