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의 아버지와 가브리엘의 아버지는 사이좋게 이웃하여 평생을 살았다. 두 집안 식구들도 서로 도와가며 농사를 짓고 넉넉하게 살림을 유지하였다.
이반의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병든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이반의 암탉이 가브리엘 집으로 가서 알을 낳았다. 이반의 며느리가 가브리엘의 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다가 가브리엘의 아내와 우연히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험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시어머니인 이반의 아내가 와서 합세하고 급기야 두 집안의 가장인 이반과 가브리엘까지 뒤엉켜 걷잡을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온갖 사소한 일에도 두 집안은 참지 못하고 7년 동안 다투게 된다. 양 집안이 법원에 앞다투어 고발을 하는 와중에 드디어 가브리엘이 법원에서 태형을 당하는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에 판사는 직권으로 형의 집행을 중지하고, 마지막으로 두 집안이 더 이상 다투지 말고 화해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 가브리엘은 분노하여 이반의 집에 불을 지르려 하였고 이것을 이반이 직접 목격하였다. 불을 빨리 꺼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가브리엘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불지르고 도망가는 가브리엘을 쫓아가다가 가브리엘에게 맞아서 기절하게 된다. 그 사이 이반의 헛간에 붙은 불이 번져 이반의 집을 태우고 연이어 그 옆의 가브리엘의 집도 모두 태우고, 급기야 마을의 절반이 불에 탔다.
화재로 인하여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던 이반의 늙은 아버지는 이반에게 가브리엘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너의 잘못도 인정하라는 마지막 당부와 “버려둔 불꽃이 집을 태운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게 된다. 이후 이반은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가브리엘이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다. 이에 가브리엘도 이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 세대와 같은 친분을 다시 회복하여 이웃으로 살게 되었다. (톨스토이 단편집, “버려둔 불꽃이 집을 태운다.” 1885년 작)
이 단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양쪽 집이 불타 잿더미가 되자 “이제 이 죄가 누구의 것인지 말해보거라”라고 아버지가 이반에게 물었을 때이다. 이반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불을 지른 가브리엘의 죄가 아니라) 저의 죄입니다. 아버지와 신 앞에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용서를 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에는 이반의 아버지처럼 진심으로 말해주는 어른도, 이반처럼 아버지의 준엄한 꾸짖음에 뉘우치는 아들도,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예전의 관계를 복원하는 가브리엘 같은 이웃도 보기 드물다. 분쟁을 소송으로 끝장을 보려 하고, 안되면 유튜브나 댓글로 벌떼같이 달려든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나, 아무것도 잘 되어가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지금부터 24년 전인 2000년 6월,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대규모 의사 파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에도 전공의들이 병원을 다 빠져나갔고, 교수들만 병원을 지키거나 아니면 교수들마저도 진료를 중단하였다. 의대생들은 자퇴서를 제출하였고 국가고시 시험도 거부하였다. 당시에 나는 K 의대의 조교수로 임용된 지 석 달 만에 파업을 맞게 되었다. 응급실에 교수님들이 직접 당직을 섰고, 수련의도 펠로우도 없이 밤 늦게까지 전신마취를 걸어주는 교수님들이 함께하여 그 시기를 버텼다. 수련의와 교수들 간의 의견 차이는 별로 없었고 의료계와 정부는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나 물밑접촉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4개월 째 접어드는 지금의 수련병원 전공의의 집단 사직 상황은 20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
첫 번째, 정부와 의사 간에 막말과 위협이 오가는 것이다. 서로 주장이 강하게 부딪치면 감정적이 되어 메시지보다 메신저의 태도가 중요해진다. 2000명을 증원하면 의대 학생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것보다도 업무 개시명령, 위반사항 신속수사 및 엄정대처가 발표되었고 의사를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고가면서 험악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이반과 가브리엘 집안사이의 7년 다툼이 시작된 것은 가브리엘 며느리가 뱉은 험한 말 한마디였다.
두 번째는 언론에서 양자가 주장하는 의견을 있는 그대로 방송하여 알리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반과 가브리엘 집안 싸움을 판사가 다 듣고 중재를 하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고마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 대화 창구가 없고 무력감에 빠져 있다. 이미 여러 번의 정부-의사단체간 충돌 후, 양쪽 모두 예전처럼 토론이나 여론 수렴에 희망을 거는 것 같지 않다. 이반은 이웃과 싸우는 와중에 그래도 아버지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쪽도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서는 ‘다 타버린 잿더미 위에서 새로 시작한 두 집안은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지금 우리는 반쯤 불에 타서 집안의 절반만 남아있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 버려둔 불씨를 먼저 끄고 더 큰 피해를 막아야 하는데, 이대로는 다 타버리고 더 탈것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까지 갈 것 같아서 미래가 걱정된다.
“버려둔 불꽃이 집을 태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반 아버지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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