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대신 닭

  • 등록 2025.08.06 17: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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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며칠 전, 일상 속에서 자칫 사소할 수도 있는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오후 진료가 한창일 때, 책상 위에 놓인 사용한 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둔다면, 직원이 본연의 일이 아님에도 씻게 될 것 같아, 내가 사용한 컵은 내가 닦자는 생각에 세면대에서 씻기 시작했습니다. 컵 가장자리를 돌려가며 세척 하던 중, 갑자기 손안에서 ‘부지직’ 하며 컵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컵 가장자리를 닦느라 움직이던 손을 멈추지 못해, 깨진 유리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깊게 베이고 말았습니다.

 

‘앗!’ 하는 순간 피는 세면대 전체를 뒤덮었고, 손으로 눌러도 좀처럼 지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이러다 손가락을 잃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감이었습니다. 다행히 거즈로 단단히 압박하자 겨우 피가 멎었습니다. 움직임을 봐서는 신경이나 인대는 손상되지 않은 듯했고, 살만 깊게 베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정확한 진단은 병원을 가봐야 알 수 있었지만, 남은 환자가 있었기에 불편한 손가락에 위에 큰 사이즈의 장갑을 덧대어 겨우 진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외과를 찾아갔습니다. 원장 선생님께서 거즈를 조심스럽게 제거하시고 상처 부위를 살펴보실 때, 과연 얼마나 깊을지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베인 부위가 잘 압박된 상태로 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상처를 면밀히 살펴보시곤, 잘 아물 것으로 보인다며 봉합은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연 치유를 유도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상처 부위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샤워도 마음껏 하지 못했고, 오른손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루 종일 환자를 볼 때에도 다친 엄지손가락을 최대한 쓰지 않으려 노력했고, 대신 주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진료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늘 주 역할을 하던 오른손과 엄지를 잠시 쉬게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일상에서는 어떻게든 왼손을 사용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 해오던 행동들을 왼손으로 대체하니 처음엔 너무 어색했습니다. 양치질 하나에도 두세 배의 시간이 들었고, 식사 때 수저질은 지그재그로 흔들려 고개까지 따라가야 했습니다. 글씨 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지퍼 하나 잠그는 일조차 왜 그렇게 힘든지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의 효율은 떨어지고 속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꿩 대신 닭.’ 왼손은 오른손만큼 능숙하진 않았지만, 만약 왼손마저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오른손이 멀쩡할 때는 왼손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오른손을 못 쓰게 되자, 그동안 소외됐던 왼손의 존재가 얼마나 고마운지 새삼 느껴졌습니다.

그 생각이 확장되니 치과 진료실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대했던 결과, 이상적인 치료, 최고의 선택이 항상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최상의 상황이 아니거나, 환자와의 rapport가 부족하거나,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차선책을 선택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속으로 스스로를 위축시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런 ‘닭’과 같은 차선의 선택이 오히려 예상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해, ‘꿩’보다도 더 보람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는 치과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원하던 집 대신 선택한 다른 집,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조건 뒤에 찾아온 새로운 기회, 큰 성공의 길은 접었지만 대신 누리게 된 시간적 여유와 소소한 행복들… 그 모든 것들은 마치 우리의 왼손처럼, 사용하기는 불편하지만, 묵묵히 우리를 도와주는 ‘닭’과도 같은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이번 오른손 부상의 경험은 저에게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 그리고 차선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서툴지만 기꺼이 저를 도와준 왼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삶 속에서 마치 공기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역할을 해주었던 수많은 ‘닭’들에게도 함께 인사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들 곁에도 눈에 잘 띄진 않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왼손’, ‘닭’ 같은 존재가 있지 않으신가요? 그 ‘닭’은, 어쩌면 ‘꿩’보다 더 귀한 가치를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소중한 존재를 놓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잘 품어 안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승준 드림분당예치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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