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의료정보학을 전공한 치과의사이자 변호사로, 현재는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회사에서 일하며 자회사에서는 바이오텍과 메드텍 스타트업 투자를 겸하고 있습니다.
최근 초등학생 딸이 진로탐색 관련 학교 숙제로 “아빠는 직업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잠시 머뭇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면, 제 정체성의 중심에는 여전히 ‘치과의사’라는 이름이 가장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제 일상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로 가득합니다. ‘치과의사/변호사’라고 적힌 명함을 주고받고 나면 어김없이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치과의사를 그만두셨어요?”
하도 자주 받아서, 명함 한쪽에 간략한 설명을 인쇄해둘까 농담처럼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뚜렷하고, 쉽게 다른 일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의아함의 밑바탕에는 결국 “치과의사는 편하게 돈 잘 번다”라는 통념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는 제 아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외삼촌, 멀리는 지난달 제가 스케일링을 받은 송도 사무실 건물의 치과 원장님까지...
각양각색의 진료실을 지켜본 제 결론은 명확합니다. 치과의사는 결코 ‘편하게 돈 잘 버는’ 직업이 아닙니다.
물론 면허로 보장된 진료 영역이 있고, 대부분이 개원을 통해 자영업 형태로 일한다는 점에서 독립성과 안정성의 프리미엄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성적인 진료보조 인력난, 치솟는 인건비와 임대료, 그리고 요즘처럼 AI로 세운 진료계획서를 들고 와 옆 동네 치과의 ‘초특가 임플란트’를 비교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난이도가 급상승한 직업도 드뭅니다.
이런 현실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 스스로의 길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곤 했습니다.
여하튼, 저는 진료대 앞에서 사람의 입을 들여다보던 손으로 어느 순간 법전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수 대에 걸친 치과의사들의 삶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느꼈던 수많은 제도적 한계와 불합리함이 마음 한켠에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험 급여와 비급여의 경계, 광고 규제, 의료사고 분쟁 등...
치과의 일상은 늘 법과 제도 속에서 움직였지만 정작 그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 복잡한 틀을 안쪽에서 한 번 해석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로스쿨을 다니며 학비를 벌기 위해 진료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주말에 엔도나 임플란트 세미나에서 갈고 다듬은 술식을 활용해 오전 진료를 마치고, 오후엔 허둥지둥 학교로 향하던 그 시절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진료할 때 판독하기 어려운 케이스가 있으면 바쁜 아내를 붙잡아 고진선처를 앙망하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은 진료의 손끝을 잠시 내려놓았지만, 그 손으로 배운 집중력과 성실함은 여전히 저를 이끌었습니다. 법이라는 또 다른 도구를 배우는 시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얻은 시간이었습니다.
변호사로서 저는 디지털 헬스 기업과 제약사, 의료기기 회사들의 자문을 맡았습니다. 환자 대신 기업의 고민을, 진료 대신 규제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이야말로 제가 의료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한 시간이었습니다. 법과 시장, 산업의 논리 속에서도 결국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의 몸’과 ‘환자’가 있었습니다. 치과의사 출신이라는 배경은 저를 설명하는 문장이 되었고, 의료의 언어를 잃지 않게 해주는 근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치과에서 외도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고 지금은 규제와 산업, 투자와 스타트업, 그리고 기술 정책까지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치과의 냄새가 납니다. 어릴 적, 진료를 마친 아버지의 치과에 남아 있던 ZOE가 굳어가며 풍기던 달콤하면서도 매캐한 향, 그 위에 알코올과 러버댐 냄새가 엷게 섞인 그 공기 말입니다.
그 냄새는 제게 ‘출발점의 냄새’로 남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제가 하는 일의 밑거름이자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것도 결국 치과의사라는 출신이었습니다. 치과에서 배운 손끝의 섬세함, 환자를 대하던 태도, 그리고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던 그 시절의 감각이 지금의 제 일에서도 여전히 중심을 잡아줍니다.
결국 저는 여전히 치과의사입니다. 다만 지금은 진료의 자리에 서 있지 않을 뿐, 그때 배운 시선으로 의료와 산업, 제도와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