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약(誓約)의 의미

  • 등록 2026.06.10 14: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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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진 칼럼

서약(誓約)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명예와 책임을 걸고 공동체 앞에서 의무를 선언하는 행위이며, 인간 사회를 지탱해 온 가장 오래된 윤리적 장치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서로의 서약을 믿음으로써 협력할 수 있었고, 공동체는 그러한 신뢰 위에서 질서를 유지해 왔다. 법과 제도가 아무리 정교해도 공동체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말과 책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서약은 바로 그 신뢰의 출발점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약속을 지키는 일을 인간이 따라야 할 절대적 도덕 의무라고 보았다. 누구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약속을 깨뜨릴 수 있다면, 결국 ‘약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자들 또한 서약을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원리로 이해했다. 인간 사회는 강제력만으로 온전히 유지되지 않는다. 서로가 최소한의 약속은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는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최근 제34대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단 선거 이후 이어지고 있는 혼란은 서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낙선 후보 측이 직무정지가처분과 당선무효소송 등을 연이어 제기하면서 협회는 회장 직무대행 체제라는 비상 회무 상황에 놓여 있다. 법적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지만, 이번 사안을 단순한 법적 다툼만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선거 과정에서 모든 후보자들이 선거관리위원회 입회 아래 공정선거와 결과 승복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직접 작성했기 때문이다. 즉, 이번 논란은 단순한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 스스로 밝힌 약속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 서약은 단순한 형식적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선거 결과를 존중하고 협회의 질서를 지켜 나가겠다는 공적 선언이며, 공동체 앞에서 스스로 책임 있는 태도를 약속한 행위다. 선거는 경쟁의 과정이지만, 동시에 결과에 대한 승복을 전제로 성립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승복이 없는 선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끝없는 투쟁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후보자들의 서약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협회의 민주적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법적 권리의 행사는 존중되어야 한다. 중대한 절차적 하자나 명백한 위법이 존재한다면 사법적 판단을 구하는 일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결과 승복의 서약이 쉽게 흔들리고, 선거 이후마다 소송과 대립이 반복된다면 결국 훼손되는 것은 특정 개인의 명예에 그치지 않는다. 협회의 민주주의와 구성원 간 신뢰,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질서가 함께 흔들리게 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의 선거 문화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보다 불복과 소송이 하나의 정치적 수단처럼 자리 잡게 된다면, 앞으로의 선거는 공동체 통합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갈등의 연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과 법적 다툼이 계속된다면 회원들은 피로와 냉소를 느끼게 되고, 협회 운영 전반에 대한 신뢰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치과의사협회는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라 높은 윤리성과 공공성을 요구받는 전문직 공동체다. 치과의사는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존재하며, 협회 역시 구성원들의 자율과 책임 위에서 운영된다. 그렇기에 지도자 후보들의 언행과 태도에는 더욱 무거운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이 스스로 한 약속의 무게를 가볍게 여긴다면, 회원들에게 협회의 윤리와 질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반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서약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민주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절제다. 지금 협회에 필요한 것은 끝없는 대립과 소송의 확대가 아니라 스스로 서명한 약속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고, 흔들린 질서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책임 있는 자세다. 공동체는 승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절제와 책임,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안정을 우선하려는 성숙한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민주주의도 가능해진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손병진 서울SNU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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