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포도에 대한 생각

  • 등록 2026.07.15 15: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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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칼럼

국내에서만 지내온 내게 유창한 영어 회화는 평생의 숙제였다. 몇 해 전, 인천 송도 뉴욕대 한국 캠퍼스에 근무하는 환자분께 영어 회화를 연습할 친구를 소개해 달라 부탁드렸고, 유타대학교에 근무하는 후배 제임스 박을 소개받아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제임스는 사실 영어 회화를 연습해 보겠다고 만난 친구였지만 한국말이 더 편한 교포였다. 몇 차례 만나다 보니 어느새 영어 공부라는 목적은 잊고 한국 사회의 안타까운 점에 대해 대화하며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푸념을 듣게 되었다.


“한국 생활은 너무 각박해요. 서로를 돕고 더불어 사는 것이 기본인 유타 사람들과 달리 다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저는 솔직히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유타주에서 자란 제임스의 눈에는 한국 사회가 유타에서 보던 따뜻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각자도생의 사회로 비쳤던 것이다.


제임스는 이어서 숫자를 이야기했다. 유타주는 미국 내에서도 기부·봉사활동 참여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주민의 절반이 넘는 50%대가 나눔에 참여한다고 한다. 반면 한국의 참여율은 8%대에 머물러 있었고, 2026년 현재 그마저도 4%까지 떨어졌다(표 1).

 

 

그는 이렇게 비유했다. “유타에서는 누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지나가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다가와 돕습니다. 한국에서는 스물다섯 명 중 한 사람만 다가오는 셈이죠.” 숫자로 들으니 더 각박한 현실이 와 닿았다. 나에게도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지만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라는 생각… 우리가 종종 느끼는 이 사회의 삭막함과 불안감의 실체가 바로 이 통계 속에 있었다.


그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유타대학교의 형편이 어려운 한국 학생 4명을 위한 1년치 용돈 지원이었다. 한국 사회에도 서로 돕는 문화가 있음을 제임스에게 보여주고 싶어 나부터 시작한 작은 실천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보았던 ‘원숭이 오이·포도 실험’ 영상이 다시 떠올랐다(그림 1).

 


서로 다른 우리에 갇힌 두 원숭이에게 같은 일을 시킨 뒤, 한쪽에는 오이를, 다른 쪽에는 포도를 주었다. 처음엔 오이도 맛있게 먹던 원숭이였지만, 옆 우리의 원숭이가 포도를 받는 것을 본 순간부터 화를 내며 오이를 던져버리고 일하기를 거부했다.


실험이 전하는 메시지는 당연하다. 원숭이, 사람과 같은 사회적 동물은 불평등과 불공정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실험을 볼 때마다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포도를 받은 원숭이가 오이를 받은 원숭이와 함께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바라볼 때 치과의사인 우리는 포도를 받은 쪽에 가깝다. 물론 그 이면에는 수년간의 학업과 개원의 부담, 끝없는 자기계발이라는 땀과 눈물이 있었으나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결과일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순수하게 개인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이를 손에 쥔 이들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 치과의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분명 포도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동료 치과의사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여유가 생기면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나는 10여년 넘게 해외 진료봉사를 다니고 있는데, 더 많은 것을 받는 기분이다. 감사의 자세와 여유로운 마음은 기부와 봉사가 주는 큰 선물이기도 하다. 기부와 봉사를 ‘언젠가 여유가 되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받은 포도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거창할 필요는 없다. 매달 진료실 한쪽에 작은 기부함을 두는 것도 좋고, 장애인 시설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하는 것도 좋다. 인근 보육원 아이들의 진료비 일부를 감면해 주는 작은 실천도 결국은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중요한 것은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포도를 인식하고 나누기 시작하는 마음가짐이다.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졸업 30주년을 맞은 나의 치과대학 동기들이 후배들을 위해 1억 원이 넘는 장학금을 기부했다는 소식이었다. 동기회장이 제안했고 나누는 마음을 함께 실천했다. 누군가 먼저 포도를 나누기 시작하면, 그 온기는 반드시 다음 사람에게로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유타의 나눔 문화가 한국에서도 평범한 일상이 되었으면 한다. 치과의사인 우리부터, 그 스물다섯 명 중 한 명이 아니라 지나가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되어보기를 제안한다. 제임스가 그리워하던 그 온기를 이제는 우리가 먼저 만들어가야 할 때다. 이미 받은 포도를 이제는 우리 치과의사들부터 나눌 차례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정우 인천 시카고치과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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