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자리에 남은 선물

  • 등록 2026.08.12 1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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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치과의사가 된 지는 36년,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소아치과병원을 시작한 지는 30여년이 넘어가면서 그동안 치과 내에서 겪을 만한 일들은 대부분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어, 앞으로도 치과운영에 있어서 예상하지 못할 많은 일들이 더 기다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병원 수련시절, 그리고 운영하는 치과에서 함께 일했던 많은 직원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는 일들은 반복되었습니다. 집을 이사가거나, 결혼을 하게 되어, 그리고 치과위생사가 아닌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떠난 직원도 있었고, 병원에 불만이 생겨서 자진 퇴사를 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인수인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떠난 사람의 자리는 공백이 되지 않도록 시스템으로 커버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기존의 그런 상황과 너무나 벗어나는 당황스러운 직원퇴사가 있었습니다. 치과 직원 구성이 치과위생사 4인과 리셉셔니스트 1인, 총 5인이 주 4일 근무체제로 돌아가서 매일 근무하는 직원의 구성과 숫자가 달라지는데, 그 사건(?)의 날은 진료실 치과위생사 3인과 리셉셔니스트 1인, 총 4인이 출근한 날이었습니다. 치과위생사 3인 중 한 직원은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막내 치과위생사였고 마침 그 날이 8주간의 수습 기간 마지막 날이어서, 그동안 열심히 배움에 임해준 것을 격려하기 위해 오전 진료를 마친 후 점심식사를 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일이 있다고 고사해서 막내 치과위생사만 데리고 식사 자리에서 그동안 배우느라 수고 많았다고 칭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전에 근무했던 치과위생사 두 사람에게서 카카오톡이 왔습니다.


“원장님,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보이지 않아서 결심했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그동안 수 없이 직원들의 퇴사를 경험했고, 한 번 나가겠다고 말한 직원은 잡아보았자 잠깐 더 있을 뿐이지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2년 만에 오랜만에 퇴사자가 생기는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언제까지 근무할 수 있는지만 점심식사 후 들어가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메시지가 또 도착했습니다. “짐 정리해서 지금 병원을 떠나니, 늦지 않게 퇴직금 정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눈을 의심했습니다. ‘지금 병원을 떠난다고?’ 급히 리셉셔니스트 분(치과위생사가 아닌)에게 연락해 보니 두 사람이 이미 짐을 챙겨 나갔고,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에는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오전에 근무하고 점심시간에 짐을 싸가지고 가버린단 말이야? 세상에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 스스로에게 감사한 건, 그들에 대한 배신감 같은 분노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01, 2002년생 어린 직원들이다 보니 근무하다가 순간적으로 원장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격해져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참 사람이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씁쓸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원장인 저에게 불만을 가지고, 힘들게 하고 떠나는 것은 노, 사의 입장 차이가 근본부터 있는 것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함께 근무하던 동료 데스크 직원을 홀로 남겨두고 매정하게 떠난 모습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직장은 결국 사람이 함께 일하는 공간이고, 동료애라는 것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습니다. 현실은 오후에 20여명의 예약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여명의 환자는 숙련된 치과위생사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숫자인데, 치과위생사 두 명이 갑자기 사라진 상태에서 남아있는 인력이라고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함께 볼 수 없는 데스크 직원과 오늘에야 겨우 수습교육을 마친, 혼자 환자를 응대한 경험이 없는 치과위생사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다급한 상황에서 제 머릿속에서 정말 우스운 생각,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명랑해전’을 앞두고 외친 이순신 장군의 그 일성,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말입니다. 그것이 “그래! 지금 나에게는 정성을 다해서 8주 동안 교육을 해준 신입 치과위생사가 남아있지!”라는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막내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실전에서 위 선배들 없이 네가 주도적으로 해서 한 번 해보자.”


사실 그 신입 치과위생사가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교육 마지막 날, 이제 수습딱지를 떼는 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본인이 주도적으로 진료를 진행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막내 직원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무단으로 퇴사한 선배 직원들의 행동에 대해서 제게 미안한 분위기를 나타내었고, 이런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부 예약 환자들에게 연락해 일정을 조정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직원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어서 이왕 이렇게 된 것, 어디 한 번 부딪혀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오후 진료,
놀랍게도 진료는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숙련된 치과위생사가 한 사람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대기 환자는 발생하지 않았고, 진료 흐름도 막힘없이 이어졌습니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정이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진료가 끝난 뒤 신입 치과위생사를 격려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귀가시킨 후에, 병원 뒷정리를 마치고 그 직원에게 다시 한 번 정말 수고 많았다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잠시 후 막내 직원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원장님, 8주 동안 정말 많이 가르쳐주시고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점심도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오늘 말씀해주신 것처럼 어쩌면 저에게 마지막 교육시간까지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아서 더 의미 있었어요. 처음으로 단독 퍼스트 어시스트를 경험할 기회가 되어 정말정말 많이 배운 하루였습니다! 원장님도 오늘 힘드셨을텐데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그 문자를 읽는 순간 이 어린 학생에게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인생은 그런가 봅니다. 예상했던 도움은 오지 않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손길이 내밀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실망을 안겨주고 떠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위로를 건네줍니다.
그날 오후가 그랬습니다.


떠난 두 사람의 빈자리는 분명 있었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한 막내 직원의 성실함과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떠난 직원들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보다는 그날 최선을 다해준 신입 치과위생사에 대한 감사가 더 크게 남아있습니다. 인생은 일어난 나쁜 상황에 대한 한탄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느끼는 감사함으로 힘을 얻어 살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승준 드림분당예치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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