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63)]경성치과의학교 부속의원의 개원 (하)

2005.12.26 00:00:00


 


그날 밤 12시경까지 여러 가지 책과 싸웠다. 덕분에 하악 관절 탈구에는 양측에도 편측에도 자신이 생겼다. 한 사람인가 두 사람 정도 그 후에 탈구가 있었지만 즉시 회복시켰다. 크게 입을 여는 일만 요구하므로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선생 큰 일 입니다.”
안색이 변해서 학생이 뛰어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힘든 일인 것 같다.


“침착해, 침착해.” 라고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된 거야.”
“핸드리머를 삼키게 했습니다.”
“뭐야 환자는 알고 있어.”
“예, 걱정하고 있습니다.”
“큰일 났다.”라고 생각했다. 전부터 학생에게는 실수하면 바로 화장실에라도 가는척하고 오도록 지도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쨌든 나쁜 날이다. 눈치 채지 못하면 2∼3일에 자연히 배출될 것이지만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환을 불러 지금 고구마를 입수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조금 사오도록 하여 바로 찌도록 하고 환자에게 설명을 했다. 찐 고구마와 깨끗한 솜을 작게 잘라 많이 먹인후 2일째에 핸드리머는 변과 함께 나왔다. 소란을 피우게 한 리머이다. 환자도 휴우 하고 안심했을 것이나 학생도 나도 안심했다. 나온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변속에서 확인하지 못하면 불안감이 남는다.
잘못된 발치도 몇 사람인가 했다. 상하, 좌우는 틀리지 않지만, 제1대구치와 제2대구치, 제1소구치와 제2소구치 하는 것은 맨 처음 진료할 때에는 마음이 전도(顚倒)된 것인지, 마음의 안정을 잃은 것인지 몇 사람인가 잘못했다. 실제로 그런 실수를 한 사람은 이 수기를 어딘가에서 읽으면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오카다 타다시(岡田正) 선생도 야오 타로(失尾太郞) 선생도 시료병동에 부속의원이 있는 대략 6개월 동안은 강의와 실습보다 진료가 주인 것처럼 대부분 부속의원에서 보냈다.


“야오 타로(失尾太郞 )선생이 진료 지도 하셨다.”고 말하면 그 후의 선생을 아는 사람은 거짓말이나 엉터리라고 말할 것이나 나와 1회 졸업생만은 알고 있다. 거울과 핀셋을 가지고 발수(拔髓)하시고 근충(根充)하시고 발치도 하고 지도에 전념하여 학생도 계속적으로 선생을 이용했다.
아름다운 지도이념이었다. 야오 타로(失尾太郞) 선생이 시술 다음날, 그 환자를 보면 없애야만 하는 연화아질(soft dentin)은 완전히 없어져 있었다. 병리학자로서 그 정도의 신념이 있었던 것이고 보통의 임상가에게는 없는 결벽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는 기초학자든 임상가든 비교할 수 있는 지식이 없으므로 무슨 감흥도 없이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지도를 받고 있었다.


기공의 귀찮은 것 어려운 것 같은 일은 오카다 타다시(岡田正) 선생이 담담히 처리하였다. 서두르지 않고 수선스럽지 않고 강의 그대로의 태도로 한다. 오카다 시로(岡田四郞)는 처음 치과해부학만 담당했기 때문에 일주간 동안 대부분은 진료에 종사하여 의자에서 의자로 계속 돌아다녔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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