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70)]경성치과의학교 선생 오카다 시로(岡田四郞)

2006.02.16 00:00:00


경성만보
오카다 시로(岡田四郞)는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조선사학회로부터 조선강좌가 출판되어 정말로 재미있게 끈기있게 열중해서 읽었다.
일본에 관련이 있는 기술은 양국의 사서를 참고로, 현실의 지세와 비교해 해설되어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출병의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최후에 남대문 밖에 진을 치고 본진을 내가 살고 있는 오카사키쵸(岡崎町)의 높은 대의 가운데 큰 은행나무 아래에 두었다는 해설에는 한층 더 친근감을 느끼고 산책을 쉬지 않았다.

 


고래무덤
일요일 오카다 시로가 아내와 장녀가 한강에 모터보트를 타러 나가려고 할 때, 제자 사이토 신페이(齊藤新平)와 네모토(根本) 아야꼬도 와서 일행이 5명이 되었다. 한강 인도교의 영등포측 바로 상류에 선착장이 있어 낚시대, 낚시배, 놀이배를 빌리는 것을 이곳에서 했다.
이 한강 입구 남안(南岸) 상류 노량진에 이르는 곳에 임진왜란 시에 가토 기요마사는 2일간 물을 건느지 못하고 대군을 정지하고 있었다. 처음 가토 기요마사의 진격은 아주 대단하여 파죽지세로 함경북도까지 석권해 두 왕자를 사로잡고 선발대는 만선 국경 간도(間島)까지 진출한 형적이 있었다고 역사가는 말한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대군은 평양에서 신의주로 향하는 도중 지나(支那)로부터의 원군과 전쟁에서 져서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패배의 소식을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급거 한강의 선까지 10일간에 진을 옮겼다고 써 있으나 지금과 달라서 거의가 도보로 하는 싸움이고 행군이었다. 어느 길을 통행했는지 모르겠지만 10일에 함경북도부터 대군을 이동시키는 것은 아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강남안에 2일간 정지한 것은 장병에게 휴양을 준 것인지 물의 깊이로 건너는 것이 곤란해서인지, 고니시 유키조(小西行長) 패전 후의 정황불명 때문이었음에 틀림없었다. 하여튼 물을 건느지는 않았다.


이 선착장의 위쪽에 ‘고래무덤’이 있었다. 그 비석의 뒷면에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이 써 있다.
“1908년 봄 이 땅에 어린 고래가 잘못 들어와 이곳의 어부가 모두 나와서 포획했다. 공양을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일본에서도 야무구치현(山口縣) 시모카이도(下靑海島)의 니사(尼寺)에 가면 이 땅에서 포획된 고래에게 각각 계명(戒名)을 주어 공양한 것이 1000개가 넘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길을 잃고 들어온 작은 고래여 불운하게 포획되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으니, 살아서 성불하라.” 했다.


규제에 따라서 모터보트에 탔다. 철도다리에서 인도교의 사이 몇 번 왕복했던가. 강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물보라를 일으키며 상쾌함을 만끽했다.
어선 옆에 붙어서 살아있는 피라미를 한줄 사서 귀가했다. 사이토 신페이의 말에 의하면 차 껍질에 졸이면 피라미가 뼈까지 부드러워진다는 것이었다. 요리해서 진미는 아니지만 가난하면서도 추억이 깊은 회식으로 하루의 행락을 맺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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