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삶은 네버엔딩스토리”
- 치과계에서 치과의사 함병도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 내가 치과대학이라는 이름이 붙는 기관에 돈을 내고 살았던 기간이 16년이다. 개인적인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이런 삶이 결코 행복했던 것도 아니다. 집요하게 공부했다. 그런 노력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 있지 않았을까?”
- 학부생 때도 그렇게 학구적이었나. 함 원장은 75년에 입학해서 81년 졸업했다.
“아니다. 예과 때는 낙제를 겨우 면한 수준. 입학하고 한 달만에 3선 반대시위로 학교가 서너달 휴교된 적도 있었다. 본과 때도 기초과학은 재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해부학은 흥미가 있었다. 당시 해부학교실 조교로 있던 허택 선생에게 달라붙어 카데바를 많이 헤집었었다. 임상과목은 재미는 있었는데 나이드신 교수님들이 많았고 제대로 배우는 것 같지 않다는 불만이 있었다. 당시 치과학에 대한 이해가 그 정도였지만.”
- 졸업 후 치과대학에서 치주를 전공했다(81~84년). 특별한 이유라도.
“학부생 때 당시 치주과 손성희 교수님 강의 시간에 치주과의 비전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국민들은 물론이고 치과의사들도 치주질환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치주질환은 충치보다 유병율이 높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고 치주과는 다양한 질병을 다루는 분야라고 하더라. 손 교수는 그 이후에도 나의 정신적인 멘토였다.”
- 수련의 생활은 어땠나.
“3년 내내 술 마셨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논문을 많이 읽으려고 했었지만 어떤 것이 classical article인 줄 모르고 읽었었다. 좋은 논문이 뭔지를 모르고 열심히 읽기만 했던거지. 멘토 없이 공부한다는 것이 그런거다. 그 논문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학문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어떤 의미인가. 굳이 미국과 비교하자면.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임상사진을 찍어보려고 명동의 카메라 상가를 주말마다 휘젓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카메라와 렌즈와 플래시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거의 독학으로 배웠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첫 학기에 전문사진가가 강의와 실습을 해주더라(웃음). 학문에는 멘토가 소중한 거다. 족보가 있는거지”
<45면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