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진 월요 시론]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2012.10.01 00:00:00

월요 시론
오성진 <본지 집필위원>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운전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지만, 우리의 교통문화가 참으로 좋아졌구나 하는 것을 늘 느낀다. 차분히 달리는 차량들, 차량이 밀린다고 여기 저기 비집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정체가 풀릴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볼 수 없었던 우리의 교통상황의 모습이다. 참으로 자부심이 느껴진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신호를 기다리면서 앞의 차량들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변화를 느끼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교통문화가 차분해진 것에는, 경제성장에 따른 영향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부심이 안정된 교통질서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좌회전차선의 차량들이 왼쪽 깜박이를 거의 켜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깜박이라는 것은 앞으로 자신이 좌회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뒤 차량에게 알려주는 배려다. 깜박이를 켜지 않는다고 해서 경찰이 다가와서 벌과금 고지서를 발급하지는 않겠지만, 서로를 위한 사회의 약속이다.


과속을 하지 않고 차분히 달리는 차량이 늘어난 것이라든지, 신호를 잘 지키는 일들의 이면에는 엄격한 법 집행이 있어 왔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다. 무심코 속도위반을 한 것에 대해 범칙금고지서를 받아 보지 않은 운전자들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 횟수도 한 번은 아닐 것이다. 질서유지를 위한 꾸준한 행정지도의 덕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법의 엄격한 집행으로 얻어진 것이 궁극적으로 서로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점과, 선진시민으로서 품위 있는 모습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스스로를 더욱 긍지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사회 전체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깜박이를 켜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엿보게 한다.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해서 사회가 갑자기 무너지거나 잘못되어 가지는 않을는지 모른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통문화가 변하는 데에는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아침에 변한 것이 아니다. 깜박이를 켜지 않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해서 우리의 교통문화가 후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후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부족한 부분으로 인해서 전체의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선진교통질서를 가진 국민이라고 자부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고 깜박이를 켜지 않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사회에 들어 오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검증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다. 검증을 당하는 사람이나 검증을 하는 사람이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면서도, 피검증인의 잘못을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이 검증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검증의 목적이 피검증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맡아야 할 일에 대해서 적임자인가를 판단하는 자리일 텐데, 지금까지 그러한 목적이 제대로 성취된 검증장면은 없었던 것 같다. 행정수행능력은 갑작스러운 결심이나, 치장된 업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을 무난히, 나아가서 발전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이다. 운전습관이 깜박이를 켜지 않는다고 해서 교통질서가 문란한 사회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로 인해서 부적임자로 판단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적임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에 합당한가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금언 중에,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숲 속에는 잘 자라는 나무도 있고, 자라지 못하고 말라 버리는 나무도 있다. 말라 버리는 나무가 있다고 해서 그 숲이 앙상한 숲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숲이 전체적으로 심오하다면, 그것으로 숲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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