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중의 문화산책] 꽃의 예찬 1- 야생화

2013.05.13 00:00:00

임철중의 문화산책


꽃의 예찬 1- 야생화


… 수줍은 듯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채송화 포기 헤며 디딤돌 짚어 가면/ 깻잎처럼 윤기 나는 대청마루 너머로/ 넉넉하신 외할머니 웃음소리. 


아내의 시‘외갓집 풍경’의 종장이다. 할아버님 댁 안채 회단에도 석류와 파초 밑으로 채송화 분꽃 봉선화가 즐비하고, 한 여름엔 뒤 곁 장독대를 에워싸고 맨드라미가 피었다. 솔밭 쪽 흙담 아래에서는 호박꽃이 벌을 부르고, 사당 채 둘레는 아예 무궁화나무가 울타리였다. 이렇듯 우리 백성은 조상대대로 꽃을 지척에 두고 살았다. 그것도 화분에 초대받는 귀티 나고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들꽃에서 눈의 즐거움과 마음의 행복을 얻었다. 사람의 손을 안타는 척박한 산과 들에는 야생화가 저희끼리 모여 군락을 지어 살았다. 지금도 봄이 오면 제주에는 유채가 들판에 가득하고, 남도 영취산에서는 진달래가 벌겋게 불탄다. 


유채는 그 노란 파스텔 색깔이 안구를 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하루나 김치로 밥상에 올라 늦은 봄 향기를 전하며, 끝내 온몸을 쥐어짜서 인간의 삶을 살찌우는 기름이 되니, 서민에게는 가히 축복과 행복의 꽃이다. 국민시인 소월의‘진달래’는 연시(戀詩)의 백미다. 길이로 보아 “그대여!”가 서너 번은 나올 법 한데, 그 흔한 너·당신·님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댕기꼬리 입에 물고 입만 벙끗” 하듯 빙빙 돌며 변죽만 울린다.  애정 표현이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만큼 지독하게 은근하다. 온 몸이 으스러지고 마는 유채나 사뿐히 즈려 밟히는 진달래나 가없는 헌신이요 희생이다. 큰 나무 그늘과 황량한 산과 들에서 억척스럽게 생명력을 건사해내는 ‘끈기’하며, 아무리 애가 타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몸짓만 보이는 ‘은근’,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밟히고 부서지는 ‘헌신’에 이르기까지, 바로 한국인의 심성을 고스란히 갖춘 것이 야생화다. 우리가 야생화를 닮아왔을까 아니면 꽃이 우리를 닮았을까?


삼월말까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최영근 한남대교수의 공예전시회가 있었다.


공예 품(品)이 아니라 화(畵)요, 작품전이라기보다 빅뱅과 창세기, 빛 등 일관된 주제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심오한 철학 강의다.  최 작가의 작품 이름 붙이기(Naming)만 봐도, 사유의 깊이를 짐작한다. 그러나 가장 탐나는 작품은 주제를 벗어나 한 모퉁이에 얌전하게 돌아앉은 야생화였다. 옻과 자개와 난각으로 마치 정밀화처럼 재현한 4 - 8호쯤의 야생화는, 바로 봉선화·민들레·맨드라미·할미꽃의 넉 점이었다. 작가에게는 이들이 야생화의 사군자인 게다. 누구나 잡초처럼 무심히 지나치지만 뜯어볼수록 점점 더 깊고 오묘한 아름다음에 빠져드는 것이 야생화라는 사실을 부르짖고 싶어, 초정밀 공예라는 기법을 썼을 테다. 야생화에는 아무리 철이 일러도 찾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선운사 동구 앞 동백처럼, 주모의 쉰 목소리에서 느끼는 허물없는 친근함이 있다. 세파에 시달린 수십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거울 앞에 선 뒷모습만 보아도 다시 그 등에 업히고 싶은 누님의 포근함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처럼 덤덤한 임의로움이 있다. 가야 할 때를 알아 결실을 남기고 분분히 떨어지는 낙화가, 삼십년의 법문과 참선으로도 깨닫기 어려운 삶의 섭리를 몸소 보여주는, 단 한 번이자 마지막인 필사의 공연은 또 어떤가. 인위적인 육종과 변형으로 성장(盛粧)한 주연급 꽃들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지만, 야생화야말로 성형과 화장을 거부한 꽃의 맨얼굴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진정으로 순수해서 서러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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