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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치한약수(醫齒韓藥獸, 아~ 水가 아니라 獸였구나)…

릴레이 수필 제2699번째

얼핏 신비한 약물의 이름처럼 들리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입시를 관통하는 적나라한 신조어다.


2026년 3월 중순, 학회 발표를 위해 대만을 찾은 나는 가오슝의 시내를 걷고 있었다. 학회 사람들과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밤 10시쯤이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빌딩의 벽에 중고등학생 아이들의 사진이 붙은 커다란 광고판이 보였다. 자세히 가서 보니 어느 학교 누가 영어 혹은 수학경시대회에서 몇 등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수분 후 비슷한 색깔의 체육복을 입고 시커먼 백팩을 맨 아이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밖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기다리던 수많은 어른들은 부모들이었나 보다. 아이들을 하나씩 태우고 총총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보통 내가 대만하면 떠올리는 건 반도체, 대만해협과 중국, 그리고 펑리수 과자 정도지만 그날은 거기서 대치동을 봤다. 자동차가 오토바이로 바뀐 것 빼곤 무엇이 다른가?

 

이런 익숙한 도시의 밤풍경을 한국과 대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2021년 정부의 강력한 사교육 금지정책 이전까지 베이징과 상하이의 학원가에는 아이들을 데리러 나온 부모들의 차량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학군지의 코딱지 만한 집이 천가방(天价房, 하늘을 찌르는 가격의 집)이라 불리며 수십억 원에 거래되었다. 규제 이후 줄어든 것 같지만 사교육 시장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여전히 까오카오(高考, 중국의 수학능력 시험)는 1년에 1200만 명이 응시한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입시 불지옥이 바로 중국일 것이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늦은 밤 학원가에서는 영어, 수학 학원을 마치고 부모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귀가하는 수많은 중고생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모두 1000년 이상 혹은 그 가까이 과거제도를 운영한 나라들이다. 거의 유일한 신분상승의 사다리이며 가문을 유지할 원동력이었다. 집안에 될성부른 녀석이 하나 나타나면 도박판에서 올인하듯 가문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성공은 모든 것을 보상해 주었지만, 실패는 가혹했다. 개인은 몰락하고 가문은 주저앉았다. 급제의 영광은 오늘날 입시학원 앞에 걸리는 의치한약수 합격생 숫자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 의대에 합격했나’ 뿐만 아니라 ‘의대생 남친을 사귄 썰’을 푸는 쇼츠엔 ‘좋아요’가 수백개 눌린다. 한국땅에서 과거급제는 의치한약수라는 신조어로 그 모습만 바꾸어 일 천년 동안 건재하다. 그렇다면 그날 밤 내가 본 것은 대만판 천년묵은 입시의 무간 지옥이었을까?

 

19세기 중반 중국 광둥성, 30대 초입의 입시 낭인이 열병을 앓고 있었다. 과거 시험에 네 번이나 낙방한 그는 꿈속에서 금발의 노인을 만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예수의 동생으로 각성하고는 신흥종교의 교주가 되어 난을 일으켰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다. 14년 동안 중국 대륙 남쪽의 반을 거의 점령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최소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그 여파로 청나라는 멸망했다. 입시지옥에서 고통받던 그는 정말 중국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과거 시험에 대한 실패가 이렇게 가혹하지 않았다면, 혹은 다른 출구전략이 있었다면 홍수전도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쓸려 나가는 비극도 없었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너무 현대적인 시각에서 순진하게 과거를 바라본 것일까? 나라가 망할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우리는 뉴스에서 잊을 만하면 입시와 관련된 비극적인 뉴스를 본다.

 

학생들을 위한다고 입시제도에 손을 대면 댈수록 경쟁은 더 과열되고 사교육 시장은 점점 공룡이 되어갈 뿐이다. 사실 장차 사회에서 더 좋은 위치를 점하고 더 많은 수익을 벌고 싶은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근본적 욕구일 것이다. 그래서 입시는 지옥이 아니라, 인간의 당연한 욕구가 투영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나 또한 이제 돌아가면 퇴근 후 학원가를 자동차로 배회하며 아이를 기다려야 한다. 다만 성공한 소수에 가려진 그러지 못한 다수가 극단적으로 몰리지 않도록 숨통을 터주는 사회를 입시제도의 개선과 함께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 홍수전이 등장하지야 않겠지만, 비극적인 뉴스는 좀 덜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너무 멀리 나가 버렸나 보다. 대만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마신 금문 고량주의 취기가 아직은 시린 초봄의 밤바람에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