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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시간

황충주 칼럼

5월 연휴에 강원도 원주에 있는 ‘뮤지움 산(SAN: Space Art Nature)’을 다녀왔다. 산속에 감춰진 뮤지움은 노출 콘크리트의 미니멀한 건축물의 대가이며 빛과 물과 바람을 인간 삶에 가장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가 설계하였다. 4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전시하고 있는 작품은 숯의 작가로 알려진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이며 한국 작가 개인전은 개관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1956년 경상북도 청도에서 태어난 이배 작가는 작품 활동을 위해 198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당시 물감이 비싸 드로잉 재료를 찾던 중 슈퍼마켓에서 바비큐용 숯을 찾아 재료비를 아끼게 되었다. 이후 숯을 이용하여 작품 활동을 하면서 ‘숯’이라는 단일 매체에 파고들며 한국의 전통성을 국제 현대 미술에 접목시켜 2018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을, 202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미술관 입구에서 맨 처음 만나는 작품은 8m로 쌓아 올린 7톤의 숯 기둥인 ‘불로부터’이다. 4년 전 큰 산불이 난 강원도 고성의 화재 현장을 보고 이 재앙으로부터의 회복과 치유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전시장 로비에는 ‘붓질’ 16점을 풍경처럼 엇갈려 설치해 산책하듯 보게 했다. 숯가루를 이겨 만든 안료를 먹처럼 찍어 그은 대형 회화로 작품의 붓자국이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자연의 빛과 만나, 시간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갤러리 1, 2관은 화이트와 검정으로 나뉘어 전시하고 있다. ‘화이트’ 공간에는 아직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긴 종이가 걸렸고 그 주변에 흰색 조각들이 설치됐다. 흰 벽에 작가의 힘찬 붓질이 그려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먹의 농담으로 만든 반짝이는 회색빛 회화 같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먹이 아닌 3만 5000개의 날카로운 금속 파편인 스테이플러 심들을 하나하나 박아 완성한 작품이다. ‘검정’ 공간에는 숯덩어리가 쌓였고, 바닥에는 다양한 붓질이 있다. 모두 같은 검은 숯처럼 보이지만 잣나무, 포도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로 만들어졌고 바닥의 붓 선도 같은 검은색 목선으로 보이지만 역시 여러 나무의 숯에서 나온 묵으로 그렸다고 한다. 3관 ‘비커밍’(Becoming)에서는 작가가 농부의 아들로 빗질을 하듯 작품을 제작했다는 정체성을 보여준다. 9미터 스크린의 영상과 실제 흙으로 구현된 논 설치물은 땅과 신체, 시간의 순환을 가시화했다.


야외 ‘무의 공간’에는 숯을 탑처럼 쌓아 올린 형태의 10m 높이의 브론즈 조각 ‘붓질’ 6점이 산과 자연이 만들어지는 흐름속에 있다. 야외 조각물 사이를 거닐며 들려오는 새소리, 음악 소리를 들으면 본인이 주변의 자연 풍경의 일부처럼 느끼게 되는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된다.


전시회 제목을 ‘기다리며’라고 한 이유에 대해 이배 작가는 “기다림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일종의 염원이며 완결되지 않고, 부족하고, 모자란 아쉬움을 가진 마음이다. 내가 예술가라고 하지만 얼마나 예술을 이해하나 돌아봐야 했다.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내내 자신이 없었고 절망적이며 캄캄했는데, 이런 마음이 ‘기다리며’라는 제목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이배 작가의 기다림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며 거의 50년전 대학생 시절에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라는 연극이 연상됐다. 아일랜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1953년에 발표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연극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인물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용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에게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고도를 기다린다. 심지어 고도가 실존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둘은 이야기를 하지만 주고 받는 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들은 무료함과 부조리함을 견디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막이 끝날 때마다 소년이 나타나 “고도는 오늘 오지 않지만 내일은 꼭 올 것”이라는 전갈을 전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야기다운 이야기도 없고, 뚜렷한 결말도 없다. 두 사람은 떠나겠다고 말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같은 질문과 대화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들은 다시 기다린다.


연극은 봤을 때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른 채 극장을 나왔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왜 오지 않는 존재를 기다리고,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가에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처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기반 데이터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그 황량한 무대가 인간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젊은이들은 성공과 사랑을 바란다. 어른들은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며 노년의 사람들은 평온한 마지막 시간을 기다린다. 병든 사람은 회복을 기다리고,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의 위로를 기다린다. 그러나 삶은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 그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기다림이 끝나면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된다. 아마 우리는 끝내 도착하지 않을 어떤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가지만 중요한 것은 ‘고도’가 실제로 오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외로움과 희망을 배우고, 타인의 존재를 이해하며, 삶을 견디는 법을 익힌다. 그래서 기다림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시간이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카톡이나 메시지의 답변은 즉시 도착해야 하고, 검색하면 곧바로 답이 나와야 한다. 느림은 비효율적이며 기다림은 낭비처럼 여겨지고 침묵은 불안이 된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인간 존재의 진실이 오히려 그 느린 시간 속의 기다림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기다리는 고도가 희망인지, 구원인지, 기적인지 신인지 혹은 단순한 환상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도착하지 않은 어떤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며 완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결핍과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다. 사랑은 시간이 필요하고, 이해와 용서도 긴 시간이 지나야 가능해진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이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유한한 존재다. 바로 그 유한성 때문에 삶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지며 기다림 자체가 인간 존재의 이유인지 모르겠다.


작가 이배는 숯을 탐구하면서 모든 것을 태우고 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는 숯에서 새로운 생명 에너지가 응축되어 표현된 형태임을 얘기한다. 이배의 숯이 타버린 이후에도 검은빛으로 남아 있듯, 인간 역시 소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끝내 자기만의 흔적을 남긴다. 숯은 선조들이 먹을 만들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재료로, 검은 숯을 통해 한국적인 순환과 반복의 세계관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작품은 바로 그 흔적의 의미를 바로 보여주지 않고 오래 바라볼수록 조용히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드러낸다.


뮤지엄 SAN에서 마주한 이배의 검은 화면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숯이 그려낸 검은 화면 앞에 서 있다 보면 그것은 단순한 미술 작품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인간 존재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나는 조용히 묻게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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