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초록빛이 점점 진해져 가는 5월에 접어들고 이번 학기도 어느새 반을 넘어 달려가고 있다. 영광스럽게도 이 글을 쓸 기회를 준 나의 2022 KDSA 총대표라는 자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면서, 대표라는 이름으로서 필요한 자세와 그동안의 원내생 실습생활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동기들에게 또 곧 이 실습생활을 시작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본과 4학년이 되면서 졸업준비위원회 대표, 소위 총대표라 부르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항상 어떤 대표가 될 것인지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예과 1학년때부터 지금까지 4번이나 학번의 과대표를 맡아 일해왔지만, 사실 그 직책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모두가 처음 만난 첫 학기부터 과대표를 맡다 보니 그저 대다수 인원이 즐거울 수 있는 생활이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총대표가 되면서 원광대학교 치과대학 익산본원의 피성희 병원장님께서 조언해주신 말이 깊이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교수님께서는 대표로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동기들과의 병원생활을 만들어 나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갤럽 조사에 따르면 MZ세대가 리더에게 기대하는 5가지 리더십 유형 중 1순위는 업무 전문성이라고 한다. 이는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리더로부터 찾고자 하는 심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리더는 업무 전문성을 이용해 직원을 성장시켜야 하는 책임을 안고 있다 말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리더는 직원을 어떻게 성장시켜야 하는지 다음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목적을 두고 일 할 수 있도록 하고 지속적으로 상기시켜라. 직원의 입장에서 병원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떠한 연습이나 행위를 할 때, 목적은 생각지 않고 기계적인 행위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기에(돈을 버는 곳이기에) 같은 시간을 일 할 것이라면 더 많이 버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어, 1년차 교육 중 구내 포토 촬영 연습을 10회 해오라는 과제가 있었다면 10회 촬영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처음 촬영 시보다 연습 후 얼마나 발전하게 될 것인가에 목표를 두고 연습에 임한다면 어떨까? 성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방식으로 목적을 생각하고 일하는 직원과 아닌 직원의 발전 속도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필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을 1998년에 입학해 2001년 1월에 중퇴를 하고, 2001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부에 재입학한 특이한 경력으로 학창 생활을 시작하였다. 의대에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은 2000년 의약분업이라는 사태가 있었지만, 항상 공학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나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언젠가는 그만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2001년도 수학능력 시험을 보고 서울대에 입학하고 그해 군대에 입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7년에 학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나 2014년에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전기컴퓨터 공학박사를 받았다. 이후 삼성, 씨젠에서 직장 경험을 쌓은 후 2019년 항상 가슴속에 꿈꾸던 창업을 하여 지금은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었다. 다이나믹한 삶이었다. 필자의 의사친구들은 이미 전문의를 취득한 지 10년이 지나 각 분야에서 대학병원 교수 및 개원의로 활발하게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의사친구 네트워크로 창업 초기 많은 도움(재무, 기술자문)을 받게 되었고, 사업을 통해 다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지난 3년간 의사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알게 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얼마 전 여수에 다녀왔다. 새벽 6시부터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며 짐을 꾸리고 차량에 몸을 맡겼는데 이 만큼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간 바빴던 일상을 내려놓고 훌쩍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나 행복하구나 싶었다. 힐링이란 이런 것일까? 인터넷을 통해서나, 또는 말로만 듣던 여수 밤바다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에 아침부터 들떠있었다. 문득 어릴 적 들었던 ‘초록바다’의 노래 중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는데, 사실 이 노래는 나 같은 ‘어른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아니었나 싶었다. 여수는 집에서 의외로 멀었다. 6시간이나 걸렸는데, 가는 길 중간마다 창밖에 비춰진 하늘을 보기도 하고 잠이 쏟아진 탓에 쪽잠을 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는 길마다 펼쳐진 풍경들을 내 눈에 조금이나마 더 담아둘걸 하는 아쉬움도 있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마치 구운몽을 겪은 것 마냥 한 순간 꿈이었던 느낌이 들고 있어서다. 여수로 가는 도중엔 옆으로 갈라진 산을 지나가며 봄의 느낌을 완전히 몸으로 받았다. 멀리서 보이는 새싹 하나부터 그득한 나무들까지 봄의 양기가 느껴져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절로 휘파람이 나오니 너무 좋은걸?
“어느 날 자고 나니 하룻밤 사이에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라고 노래하는 사람은 평소에 꽃밭을 유심히 관찰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순식간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사람도 그렇다. 그냥 자라나서 어느 날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이 중요하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역시 하늘이 내려주신 큰 축복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또 누군가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인생길에서 수많은 스승을 만나게 된다. 스승은 선배나 연장자뿐 아니라 후배, 제자, 하물며 어린 손주까지 나이를 불문한다. 교사, 교수, 박사는 물론이고 선의를 간청하는 걸인의 눈빛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권력자의 몰락 기사에서, 유명 스타의 비참한 종말에서도 우리는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 인생길에는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렇게 스승은 좌우명으로 삼을 귀한 가르침, 직업에 꼭 필요한 지식과 기술, 삶을 살아가는 지혜,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의 경험까지 솔직하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허망한 것을 좇지 말 것과 영생의 믿음, 구원의 은혜,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설파하는 성직자, 욕심을 내려놓는 지혜를 가르치는 각 분
2016년 2월 첫 개원을 하고 2020년 3월,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할 때 확장이전을 했다. 그 땐 아무리 팬데믹이라고 할 지언정 1년이면 사라질 줄 알았다.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1차, 2차, 3차 예방접종이 시행되고, 수없이 반복되고 변하는 거리두기에 맞추어 지내다 보니 어느덧 2년 넘게 지났다. 2년이 넘는 팬데믹 기간동안 나름 코로나를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미크론은 필자에게 그 생각이 착각이였음을 깨닫게 했다. 내원한 환자분들이 며칠 후 확진자 판명이 나는 횟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누적 환자수가 만여명을 넘길 땐, 직원들이 한, 두명씩 걸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한 자가격리의 기간동안 직원 부족난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어디 뭐라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렇다고 부족한 직원에 대비해 직원 채용은 더더욱 어려운 현실이다. 누적 환자수가 몇십만명이 되었을 땐, 예약 표에 찍어 낼 잉크도 자가격리를 하는 중인지 빈 칸이 점점 늘어만 갔다. 환자 캔슬 사유도 처음 코로나 시기 땐 감염될까 무서워 내원이 꺼려졌다면 최근엔 증상과 확진 이유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매출 감소는 뻔하다. 1, 2, 3월은 원래 치과계 대목 달 아
‘Made in Germany’ 전 세계 어디에서든 독일제 제품들은 사랑을 받는다. 모두가 꿈꾸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들뿐만 아니라 전자제품, 주방용품, 비타민, 최근에는 유기농 제품들까지, 사랑 받는 제품들의 스펙트럼 또한 매우 넓다. 이렇게 독일 회사의 다양한 제품들이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정교한 기술력, 뛰어난 성능, 안정성 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이러한 이미지를 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은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Deutches Reich)을 그 모태로 한다.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 경제와 산업화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 영국과 비교해 본다면 그 발전이 매우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은 위의 나라와 달리 탑다운 방식 즉, 국가 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독일 경제를 이루고 있는 집단은 크게 자본가, 기술을 가진 장인,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본가들은 기득권을 잃지 않길 원했고 장인 집단은 그런 자본가들을 자신들을 억압하는 탈취자들로 여겼다.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사람들은 ‘꿈이 뭐냐?’고 흔히 질문한다. 남들은 유튜버, 교사 등 쉽게 답하는 질문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 했다. 고등학생 때 희망 진로에는 아버지의 직업인 ‘회사원’을 적었고, 공부보다 게임이 좋았던 나는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야간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밤새 허리가 끊어지게 일을 하고 받은 일당은 8만원이었다. 욕설이 난무하는 이곳을 벗어나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싶었고, 그 결과로 치과대학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큰 생각이 없었기에, 예과 생활은 세상에서 제일 신나게,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보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과목만 열심히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은 동기들과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예과 2년을 보냈고 석차는 당연히 바닥이었다. 본과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업의 절반은 실습이었고 구강과 관련된 말밖에 없는 전공 책을 보며 마음이 아주 답답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법랑질과 상아질도 구별 못 하고 영어로도 쓸 줄 모르는 실력이었기에 책을 보면서 두려움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그래도 기본은 하자라는 생각에 강의를 듣고 공부하기 시작하였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너무 부족하고, 안일하게 지내왔다는 생각에
학사모를 던지며 치과대학 졸업이라는 결실을 만끽했다. 치과대학 합격 통지의 기쁨에서 시작된 여정이 본과 진입하고 시작된 수많은 시험과 실습 그리고 원내생이 되어 환자를 직접 보면서 가슴 철렁하는 순간들을 넘어 치과의사의 관문인 국가시험을 합격하여 드디어 6년의 대장정이 치과의사 면허라는 선물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졸업에 대한 기쁨과 함께 막상 동고동락한 동기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어린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응원의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전공의 수련을 받기로 택한 동기들부터 국가의 부름으로 논산훈련소를 가는 동기들 그리고 바로 환자들을 치료하러 로컬 치과 취직을 하는 동기들까지 다들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필자는 전공의 수련이나 병원 취직이 아닌 다소 생소한 창업의 길을 걷기로 했다. 창업을 처음부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외국계 사모펀드 회사를 다니던 친구가 매각 나온 회사에 대한 리서치를 위해서 치과의 디지털화에 대해서 가까운 본과 2학년생인 필자에게 물어봤다. 당연히 필자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학교에서는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실습과 함께 디지털 방식에 대
생각해보면 인간이 고통없이 수술 받은 것이 150년도 안됩니다. 과거 전쟁 중에 상처가 나면 괴저가 일어나기 때문에 상처부위를 빨리 절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외과적 방법이었습니다. 끔찍한 일화 중 하나는 외과의가 톱으로 다리를 절단하는데, 조수가 다리를 잡고 있다가 손가락이 같이 절단되어서, 환자는 감염으로 죽고, 조수 또한 감염되서 죽고, 수술을 구경하던 구경꾼 또한 놀래서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져 옵니다. 그만큼 외과의의 속도가 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외과수술이 필요한 말만 들어도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유서를 쓰고 수술을 받느니 자살을 선택한 환자들이 많았을 만큼 당시의 외과수술은 “끔찍함” 그 자체였습니다. 독한 술을 먹거나, 목을 졸라서 잠시 재우거나, 양귀비 같은 마약류를 이용한 기록들은 조금씩 있으나, 제대로된 마취제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1840년대 웃음가스파티가 유행하였는데, 웃음가스(N2O)가스를 마시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파티를 즐기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신문에서 여러가지 삽화로 그런 세태를 풍자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가스 화학의 발전으로 여러 중요한 사건
설날을 기점으로 壬寅年 시작과 함께 평생 처음 전신마취 하에 수술을 받고, 원내 감염으로 코로나 확진까지 받게 되었다.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20만 명을 육박하고 있으며, 쉽게 끝나지도 않을 것 같고, 우리 회원들도 병원에 가야할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필자의 경험에서 얻은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매년 받는 건강검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반검진에 암 진단항목을 추가하자. 그 중의 하나가 전립선암 검사를 위한 PSA이다. 필자도 2년 전부터 수치가 증가 되었지만 설마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1년 전 검사에서도 수치가 지속적으로 높아서 비뇨기과 진료를 받았는데 전립선비대라고 하였다. 70대에 70%이상 비대가 있다고 하는데 비대의 원인은 명확치 않으나, 유전적 원인 및 감염이나 암 등이라고 하였다. 우선 항생제를 포함하여 약을 쓰기로 하였다. 3개월 약복용 후 정상수치로 내려왔다. 암이라면 항생제에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안이한 생각과 장기간 항생제 복용에 대한 걱정으로 항생제를 빼고 2개월간 복용했는데 다시 증가되었다. 이후 항생제를 추가하여 다시 복용하였는데 숫치가 지속적으로 높았다. 조직검사를 빨리 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직검사의 정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