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좋아하는 나는 모든 스포츠를 즐긴다. 특히 대학시절에는 구기종목 축구와 농구에 빠져 하루일과나 수업이 끝나면 꼭 운동장으로 달려가 게임을 뛰곤 했다. 농구를 하는 동안은 무아지경 그야말로 게임에 빠져 온 힘을 다해 뛰고 부족한 점을 체크하고 내일은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숙사에 돌아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보다 운동을 할 때 더 몰입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왜냐하면 게임이나 운동을 하는 동안은 시간의 흐름 자체를 느끼지 못했고 나의 뇌속에는 공과 링 혹은 골대만 보였다. 당시 농구와 축구 동아리 대회가 매년 있었기 때문에 우승을 목표로 열심히 한 이유도 있었다. 목표가 확실한 운동경기에서 시간이라는 변수가 끼어들 수가 없는 듯 했다. 운동에서의 몰입이 끝나면 약간의 허무감이 찾아오고 내일 또 그 몰입에 빠져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어찌보면 몰입은 중독과 맞닿은 선에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 뇌연구에서는 도파민의 과잉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서 중독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몰입에 빠지면 어찌보면 도파민의 과잉으로 인해 그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몰입은 중독과는 구별되는 이
“와! 수술이 벌써 끝났나요? 마취한 느낌도 없이 안 아프네요. 역시 소문대로 신세계네요!” 환자의 칭찬 앞에 30년 차 치과의사는 어린아이가 된다. 어깨가 저절로 으쓱,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이다. 치과의사는 내게 천직이다. 나의 적성에 딱 맞는 밝고 희망이 넘치는 즐거운 진료실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 24년 전 치과 원장으로 첫 출근하는 날, 나에게는 3가지의 꿈이 있었다. 첫 번째는 환자에게 좋은 진료를 베푸는 훌륭한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직원에게 최고의 직장을 만들어주는 좋은 경영자가 되는 것이고, 셋째는 학업에 매진하는 꿈나무들에게 형편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도록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이 꿈은 단 하루도 잊지 않고 실천해왔으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좋은 치과의사의 시작은 환자가 무엇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역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안 아프고 안 힘든 진료로 환자가 용기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치과를 만들 수 있을까? 최근에 25% 마취 용량만으로 수술과 발치가 가능한 마취법을 개발했다. 마취주입속도를 조절할 때 압력에 의해 생기는 무감각 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해 오신 선배님들과 지금도 묵묵히 봉사하고 계신 동료 치과의사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제가 장애인 이동 치과 진료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즉흥적이었습니다. 군 복무 중에 같이 교정 세미나를 하던 동료와 선생님의 권유가 시작이었지만 실은 진료 후 돌아와서 먹는 저녁과 소주 한 잔이 즐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중증 장애인들이 기거하는 소규모의 비인가시설을 방문해서 진료한다는 자부심도 컸던 것 같습니다. 대기업 재단의 후원을 받았던 그 단체는 치과의사, 치과위생사, 치과기공사,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가 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진 지방의 30~40명 내외의 장애인 비인가 시설을 정하여 시설 내 치과 진료실을 설치한 후에 2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모든 원생의 진료를 마칠 때까지 진료를 진행하였습니다. 대략 시설당 준비기간 포함 1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습니다. 20년도 더 전인 것 같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버스가 시설까지 올라가지 못해 큰길에서 장비를 들고 한참을 올라가서 진료를 해야 했던 곳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비장애인들에 밀려서 장애인 복지시
요즘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올 초 4개월 간에 걸쳐 통독한 ‘토지’의 마지막 문장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가 떠오른다. 올 여름 서울치대 박물관장님이 전화를 주셔서, 올 봄에 경기도치과의사회의 유물을 이관 받았는데 외조부님의 졸업증서와 치과 간판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셨다. 제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다리에 기력이 없어지셔서 주로 방에서 책을 보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1900년생이시며 군포에서 면서기 생활을 하시다가,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가 야간 2년제로 개학하던 해에 입학하셨다. 1923년 주간 3년제로 바뀌면서 학비 조달에 어려움이 생겨 1년간 휴학하고 2회로 졸업하셨다. 1933년 경기도 수원의 팔달문 근처에 2층 적산가옥을 얻어 ‘이창용 치과의원’을 개설하셨다. 당시 일본인 치과의원도 있었지만, 더 많은 조선인 환자들이 치료받으러 왔다고 한다. 가정집과 붙어 있어서 밤에도 응급환자가 찾아오면 치료해주셨으며 시간이 늦어 교통편이 끊어지면 2층 다다미 방에서 재워주셨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농기구를 이용하여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좀 있었으며, 턱을 다친 환자는 철사를 이용하여 악
부부 교사를 하면서 저를 이렇게 잘 키워주신 저의 아버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1938년생 올해로 만 84세이십니다. 아버지는 7남매의 장남으로 그 당시 장남들이 다 그러했듯이, 집안을 책임지고 동생들을 가르치고 결혼시키는 그런 전형적인 장남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전북대 수의학과 57학번으로, 졸업할 당시 수의사 국가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하셨다고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 동기들은 동물병원 개원을 많이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교육에 뜻을 두셔서 농업고등학교 축산과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그 당시 서울 S대 수의학과 교수님께서 국가고시에서 수석 졸업한 아버지께 대학원생으로 들어오면 교수로 키워주겠다고 하셨다는데, 7남매의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계셨던 아버지는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가기보다는 농촌진흥청에 취업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아버지는 전북지역에 있는 6개 농업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면서 30여 년간 축산과 교사로서 일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당시 제자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치킨 기업인 주식회사 하림의 김흥국 회장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교회에서도 고등부 교사로서 오
지난 5월, ‘구강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은 앞서 시행한 여러 나라의 사례가 있고, 우리나라 또한 서울과 경기, 부산 등 여러 지자체 중심의 사업 시행을 통해 그 효과를 입증한 바 있다.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의 목적은 치과의료 이용의 접근성, 특히 예방서비스 수혜율 향상과 사회 경제적 수준에 의한 구강건강 불평등을 줄이는 효과다. 2012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0년을 맞이하게 되는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은 지금까지의 시행경험을 바탕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줘야 할 때가 됐다. 이에 실제 사업에 참여했던 치과위생사와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을 맡았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성공적인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을 위한 의견을 모아봤다. 첫째,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은 체계화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팀워크에 의해 움직여야 하므로, 공유된 정보와 각 직종별 활동에 대한 구체적 업무 지침서나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치과위생사들은 아동 치과주치의 사업에 참여할 때, 우선 참여 여부에 대해 해당 기관장에게 통보받고, 그 뒤 관할 보건소로부터 안내 절차가 담긴 방대한 양
우즈베키스탄에는 130가지가 넘는 민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공식 통계상으로는 80% 이상이 우즈벡인이며 인구는 약 3,400만 명으로 구 소련의 구성국이던 중앙아시아 5개국 중 인구가 가장 많다. 우즈벡인은 동서양이 조화된 느낌이 있어 미인의 나라로 알려져 왔다. 한가인이 밭을 갈고 김태희가 소를 몬다고 하는 농담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터넷에 떠도는 대부분의 사진들은 우즈벡인이 아니며 러시아계 혼혈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인구 중에 1% 이상이 고려인이란 사실이다. 타슈켄트 국립치과대학내에서도 심심치 않게 한국계 교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이곳에서 뿌리를 내린 3세들이었다. 외모와 풍속은 같았으나 점점 우리말과 문화를 잃어버려 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최근 타슈켄트 대학내에 불고 있는 퇴보의 바람은 그간의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일어났던 애국 민족주의자들이 권력 앞에 허무하게 죽어갔던 슬픈 우즈벡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약 10여년전 필자의 학교를 찾아와서 의욕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어진 안식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오래전부터 생각이 많았다. 원 없이 골프를 칠까, 미국 횡단을 해볼까, 하지만 가장 좋은 휴식은 평소 하고 싶었던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키르기스스탄 동문 선교사와 박사학위 제자 및 연수 의사들이 있는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기로 했다. 키르기스스탄은 12세기에 몽골족이 세운 서요(西遼)의 진출로 인해 지금의 영토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로 추정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접경하고 있는 나라로서 자원이나 특정 산업의 발전이 없어서 중앙아시아 나라 중 거의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이다. 구 소련 연방 시절에는 아름다운 산들이 많아서 주로 관광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길에 다니는 자동차들은 대게 20년 전에 보았던 차들이 많았고 도로가 잘 정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바닥을 잘 살피고 걸어 다녀야 했다. 러시아 침략 이전에는 유목생활을 했으며,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할 목적으로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하며 혼혈과 러시아계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띠었다.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 중 1991년 독립을 선언하고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으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통령 선출 과정 등의 정치체계가 주변국에 비해
저희 녹야회는 한자로 사슴 鹿, 들 野, 모임 會로, 들판에는 푸르른 풀들이 잘 자라고 있고, 사슴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각자 가진 능력으로 사회의 구석지고 어두운 곳을 찾아 치과의료 봉사를 하고자하는 치과의사, 치과기공사, 치과위생사, 간호조무사, 기자재 등 치과계에 종사하시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만든 봉사 단체입니다. 1977년 11월 27일 4명의 치과기공사 선생님들이 모여 친목, 봉사, 사랑의 기치를 들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로 한 이후, 1977년 12월 만남 때, 동두천 백석고개 나환우(한센병) 정착촌 어느 환우가 치아가 아파 보건소에 갔는데 나환우라고 회피하며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해결방안을 논의하던 중, 1979년 5월 초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 3리 포천 음성 나환자 정착촌(포천 농축단지)를 방문하여 진료지로 정하고, 5월 13일 인천 어느 치과의원 원장님이 기증해 주신 유닛 체어(치과 진료의자)를 용달차에 싣고, 농축단지 최 회장님 댁의 구석진 방에 장비를 설치하여 진료실을 마련하고, 1979년 5월 27일 포천 농축단지
기대와 떨림이 혼재된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고 1993년 인천에서 아내 명의로 부부치과를 개원했습니다. 당시 대다수 치과의사가 그랬듯이 유니트체어를 비롯한 장비는 할부로, 임대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은 대출을 이용해서 전액 빚으로 시작한 개원이었습니다. 그때 개업 장소를 물색하며 인천지역을 함께 헤집고 돌아다녔던 신흥 소장님을 비롯해 젊은 직원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1990년대 유니트체어를 포함한 아날로그 시대의 장비는 문제가 생겼을 때, 급한대로 원장이 임시 처치를 하면 치과 직원들이 맥가이버 원장님이라고 치켜올려 주기라도 하면 우쭐하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위생적인 문제와 디지털 기기 사용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끔찍한(?) 장비일 수도 있겠네요. 누구나 그렇듯 바쁘게 지낸 세월을 돌아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습니다. 잠시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개인적인 개업 회고담을 쓰려는 것은 아니고, 지난 8월 20~21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인천국제바이오종합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인천의 치과의사와 약사님 등 의료인들이 후원을 많이 하는 ‘꿈베이커리’라는 비영리 사단법인이 있습니다. 인천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함께하던 분들이 주축이
철없는 아빠로 살기로 마음먹었기에 엄마 몰래 라면도 끓여주고 아토피에 안 좋은 양파링도 가끔 사주며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항상 아들에게 묻곤 한다. “아들아!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본다고 생각했건만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가 좋지.” 질문이 적절한 대답을 유도하지 못했기에 다시 물어봐야 한다. “아빠가 말이야, 엄마 몰래 일요일마다 라면도 끓여주고 아이패드도 사주고 했잖아. 다시 생각해봐. 아빠가 좋지?” 10살 먹은 아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빠는 말이야. 좋고 싫은 게 아니라 부담스러워.” 묘하게 설득이 된다. 생각지 못했던 녀석의 표현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사람 보는 안목이 있어 인생 사는 데 어려움이 없겠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아버지가 있다. 초등학생 때(사실은 국민학생 때) 용돈 인상을 위해 기안문을 작성해서 오라고 하시고, 여러 근거들을 노트에 적어서 가면 자꾸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다고 하시고는 부담스러운 눈빛과 함께 엄마 몰래 몇 천 원을 더 쥐어주시던 그런 아버지가 있다. 대학시험 보러 갈 때 부담스럽게 내 손을 꼭 잡아주시고, 항상 전화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