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공보의로 발령을 받을 때만 해도 여러 가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주로 학교 다닐 동안 못했던 취미에 대한 기대였다. 나는 활동적인 편이라 낚시, 캠핑, 여행, 골프 등 주로 밖에서 즐기는 취미들을 해보고자 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보의들이 그렇듯 기대와는 조금 다른 환경과 생활이 펼쳐지기 마련이고, 나 역시 꽤나 규칙적이고 폐쇄적인 생활을 요하는 지방의 어느 교도소 공보의로 부임하게 되었다. 정시 출퇴근과 교도소 내 관사에서의 삶은 운신의 폭을 생각보다 한정적으로 만들었고, 당연히, 심심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앞서 말한 취미들을 모두 경험하기에는 시간도 나지 않고 흥미도 생각만큼 동하지 않았다. 업무 외 시간 대부분을 관사에서 지내다 보니 삭막한 관사가 싫어 농협 하나로마트에 파는 스파티필름이라는 국민 식물을 들여와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 스파티필름을 바닥에 물구멍도 안 뚫린 화분에 옮겨 심고 방구석에 두었다. 물주기도 귀찮아서 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따라놓았더니 2주가 지나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도 않고 꽃도 피우길래 ‘요즘 식물은 강한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식물 하나로는 허전하기도 하고, 대충 키
우리 치과가 있는 골목에 새로 독립서점이 문을 열었다. 내 눈은 31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가게 옆을 지나가는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서점은 꽃으로 뒤덮인 세이렌들이 사는 안테모사 섬처럼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길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 서점 유리창에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동그라미와 꽃, 사람, 헵타포드 외계인들과 교신이 가능할 법한 낙서와 같은 그림들이 눈에 띄었고, 다른 날엔 하얀색 커튼 너머로 젊은 엄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오월의 햇살 아래를 꿈꾸듯 걷는 내게 ‘모락’이 달콤한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 자리에 이전에도 서점은 있었지만 내게 들어오라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 지른 선반에 다양한 제목의 동화책들이 키를 재듯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책들이 오밀조밀하게 포개져 전시돼 있었다.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골판지로 만든 자동차 장난감과 아이들의 글을 모아 만든 작은 책들이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곳에서 성인들을 위한 독서 모임 같은 게 열리나요? 아니요, 아직은 독서 모임은 따로 없습니다. 책방지기 선생님은 나의 얘길 듣고
7월 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치협이었다. 치과의사들의 코로나19 방역활동 공로를 표창하기 위한 수여식을 열려고 하는데, 전공의 대표로 참석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다. 필자는 지난 2019년부터 2년 동안 평촌에 있는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구강악안면외과에서 전공의로 수련하면서 전신 방역복을 입고 코로나 검체 체취에 참여했었다. 표창장 수여를 위해 치협에 방문했을 때, 보건복지부가 치과의 신속항원검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평소 치과의사의 진료 범위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와 관련해서 몇 자 생각을 조심스럽게 적어보려 한다. 치과의사의 진료 범위로 인한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가장 크게 이슈화된 것은 지난 2016년의 얼굴 보톡스 시술 문제다. 이때 대법원은 공개변론을 통해 치과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대법원은 얼굴 프락셀 레이저 시술에서도 치과 측 손을 들었다. 하지만 늘 치과가 승리한 것만은 아니다. 최근 치과의사의 독감 예방접종 주사가 불법으로 판결을 받았고, 그 외에도 탈모약, 체중 감소약, 발기부전 치료제 처방 논란 등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진료범위 논란이 터질 때마다 많은 이야기가 나오
야간진료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새로운 대화창이 만들어지면서 메시지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였다. 낯익기는 하지만 익숙하지는 않은 프로필 사진. 아버지였다. ‘아버지께서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용을 들여다보니, 어머니께 보내야 되는 연락을 잘못 보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언제든지 오고 갈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첫 메신저 대화였기에, 나에게 그 의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아 그동안 단톡방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따로 연락을 드린 적이 없었구나. 내가 아버지를 조금은 외롭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버지와의 옛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이셨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모습 사이로 힘들고 외로운 모습 또한 스며있었던 것 같다. 여느 때와는 달리 만취해서 집에 들어오실 때면, 나와 동생은 한껏 부푼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런 날은 빈손으로 들어오시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어렸던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 날의 아버지는 힘들고
요즘은 개인 PT샵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헬스장에서 PT(Personal Training)를 받는다고 하면 ‘오~ 운동에 돈 좀 쓰네~’라는 소리를 들었다. 비용이 좀 부담되어 그만둘까 하다가도, 혼자만의 의지로는 꾸준히 운동하는 게 힘들었기에 돈을 내고 스스로 강제성을 부여하는 목적으로 PT를 끊었었다. 특히 다이어트할 때는 각종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독하게 잡아줄 수단으로 반드시 필요했다. 트레이너: 하나, 둘, 셋... 열.. 한 번만 더! 마지막 한 번만 더! 진짜 마지막! 나: 아니, 방금 마지막 했잖아요? 도대체 언제가 마지막이에요? ㅠㅠ 트레이너: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딱 한 번만 더! 다리에 힘이 풀리기 직전까지 남은 동작을 반복하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트레이너: 마지막 세 번이 진짜 힘들었지? 그 앞에서 안 하고 싶었지? 나: 와! 진짜 힘들었어요. 트레이너: 혼자 했으면 힘든 순간 멈췄을 걸? 나: 당연하죠. 그냥 저거(가장 쉽고 편해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운동 기구)로 넘어갔겠죠. 트레이너: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우리는 알거든. 10번까지 했는데 힘들잖아. 사실은 거기서 더 이상 못하겠다
5월말 제가 일하는 업계의 큰 전시회가 있던 기간에 저는 일을 놓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작지만 커다란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인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 암 수술을 하셨었고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많이 흔들리시는걸 느꼈습니다. 그무렵 처음으로 들려주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 1960년대말에 아버지는 전북 군산에서 경찰공무원으로 첫발을 시작하셨답니다. 아버지도 젊은 나이셨지만 불우한 환경과 한번의 실수로 제소자가 된 사람들에게 3년에 걸쳐서 만오천통에 달하는 교화편지를 보내셨고 그걸 계기로 1970년 나라에서 상록수공무원 표창을 주셨으며 그때의 신문기사와 편지 일부를 낡은 상자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알지못할 그 시절 기차역에 있는 무인 도서 가판대도 저희 아버지 생각으로 시작되었다는걸 아버지 칠순때 큰댁 형님들을 통해 듣게 되었답니다. 평생 강력계 형사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않게 책을 좋아하셨고 글쓰는걸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서 버틴 세월이 순탄하기만 했을까요? 그런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용기가 없었다. 평범한 제자인 내가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송공연이라는 큰 행사에서 감사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발표를 위해 적어둔 편지는 아직도 내 가방 속에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지는 마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나의 글을 볼 거라는 생각에 여전히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보다는 교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너무 늦지 않게 표현하고 싶은 제자로서의 간절함이 훨씬 더 크다. 경희문 교수님,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교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도학생으로서 전공의 시절 동안 저는 교수님께 참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세미나에서든 식사 자리에서든 교정에 관련된 임상뿐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참 많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교수님의 진료와 교정테크닉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원을 하고 보니 교수님께서 예전에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련의 시절 때 좀 더 정신 차리고 교수님 말씀을 새겨듣지 않은 것이
예비 치과의료인들 즉, 학생들이 치과대학에서 받게 되는 이론 교육이 치과의사로서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는 내용 위주라면 개념화된 지식을 체화하여 습득하는 것은 치과병원에서의 임상 실습 중에 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치과대학과 치과병원에서 받게 되는 다양한 이론 및 실습 교육 과정은 치과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지식과 기능적 능력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 치과 의료인으로서의 철학과 사회 속에서의 역할 인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과정이자 경험이다. 따라서 치과대학 4년 동안 보고 듣게 되는 내용들은 치과의사로서의 자화상의 재료가 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역량과 기능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확립하게 되며 사회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므로 그 영향이 주위로 전파되어 거꾸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시선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작용은 국민들의 치과의사에 대한 인식 즉, 치과의사에게 기대하는 전문적 역량과 기능 범위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 치과의사의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역할과 기능 범위를 정의할 수 있으나 사회적 동의나 인식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실체가 없는 치과의사들만의
1. 체력이 있어야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우리 학교(서울대 치의학대학원)의 경우 보통 국시 필기 D-100쯤부터 국시실에 하나둘씩 모여 공부했던 것 같다. 100일, 약 3달이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은 것 같지만, 4년간의 치대 생활 동안 겪었던 여러 시험을 생각하면 꽤 긴 기간이다. 수능 이후로 이렇게 긴 페이스가 필요한 시험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지치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체력 관리는 필수다. 시험 2주 전까지는 일주일에 3번 이상 러닝·헬스 등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체력도 쌓았던게 시험 직전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2. 한 달 단위로 계획 짜기 4년 동안 촘촘히 싸인 시간표대로 생활하다가 국시를 앞두고 온전히 주어진 24시간이 조금은 낯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페이스로 계획표를 짜는 것이 꼭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 MBTI로 말하면 파워 J형이기 때문에, 달력 형태의 플래너를 구매해 한 달 단위로 계획을 짰다. 한 달 단위로 계획을 세우면 근 며칠간 어떤 과목들을 공부했는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어서 여러 과목을 골고루 균형감 있게 둘러볼 수 있다. 이때 너무 타이트한 계획도 경계해야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좋은 기억도, 지워버렸으면 하는 부끄러운 기억도 있고, 가슴 저린 아련한 기억도 있을 수 있지요. 필자는 73년 경희치대를 졸업하고, 3년의 조교생활을 거친 뒤, 76년 3월 군의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그곳에서 군 후보생 교육을 받고 치과 군의관 대위로 임관해 서부전선 최전방인 어느 육군 보병사단에 배치받고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사단은 한국전쟁 때 미군과 경쟁하면서도 평양에 최우선으로 입성해서 세계 전쟁 역사에도 기록된 최정예 사단으로 유명했습니다.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친 전설적인 부대였고, 국군 창군 시 모태가 된 부대이기도 해서 역대 군 고위 지휘관들이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아무튼 몇 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자마자 대위 계급을 달고, 사단 사령부 의무대 치과 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다보니 급격히 변한 환경에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대학이라는 온실에서 자라던 화초였다고 할까요. 그럭저럭 군 생활에 적응할 즈음,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판문점 안 남측지역에 있는 미루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북측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대표원장 대신 OO씨를 수술한 것은 치과의사였습니다.” “치과의사가 성형수술을 해요?” “자기가 받은 면허 외의 다른 치료를 했다. 그것도 무면허에요.” 지난해 MBN에서 방영된 한 프로그램은 지난 30년 동안의 나의 기록을 무면허 돌팔이 의료행위로 결론지어 주었다. ‘대학병원 구강외과는 양악전문이 아닙니다.’ ‘충치치료와 양악수술을 함께 하는 의사. 정말 괜찮으신가요?’ 모 성형외과의 광고 카피다. 이런 모욕을 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져야 하나? 학창시절 존경하던 은사님의 강의 중에 보게 된 잔인한 슬라이드 몇 장은 나의 피를 끓게 하였고 결국 구강악안면외과를 전공하고 이 분야만을 진료하는 인생을 살게 해주었다. 치과의사가 턱수술을 한다는 다소 의아스러운 개원을 한지 이제 20년 째…세상은 변했고 양악수술이 치과의 구강악안면외과의 영역 임은 이제 거의 대부분의 일반인에게 인식이 되었다. 그 길을 함께 했던 동료, 선후배 선생님들이 2004년에 함께 모여 만들었던 대한악안면성형구강외과 개원의협의회는 턱수술을 기본으로 하는 구강악안면외과 개원의들과 사랑니 발치 등 우리 분야의 진료만을 특성화 한 개원의들의 모임으로 정기적으로 학술집담회를 개최하고 우리의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