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오대산에 구정선사(九鼎)라는 스님이 계셨다.
왜 구정선사냐 하면,.
구정스님이 처음 도를 배우러 무념(無念)스님이라는 큰스님을 찾아갔다.
무념스님이 큰스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으나 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일러 주시지 않고는 “밥 해먹는 솥이 잘못 걸렸으니 이 솥을 다시 잘 걸어봐라” 하셨다. 구정스님이 온 정성을 기울여 솥을 걸었으나 무념스님은 잘못 걸렸다고 다시 걸게 하셨다.
그 말을 들은 구정스님은 어디가 잘못 걸렸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래도 할수없이 다시 뜯어 정성껏 솥을 걸었으나 무념스님은 보시고 화를 내며 “틀렸어, 다시….”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반복하기를 9번을 되풀이 하셨다.
그래서 솥을 아홉 번 옮겨 걸었다하여 구정(九鼎)스님이라 하셨다.
무념스님의 뜻은 솥을 잘 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저놈이 나를 찾아와 공부를 배우겠다고 하니 얼마나 순응하며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하는 분별을 다 쉬게 하기위해 일부러 트집을 잡아 솥을 걸게 했던 것이다.
보통사람은 두세번 걸고 나서 다시 걸라하면 스승을 원망하고 욕하며 달아났을 터인데 구정스님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오직 내가 저 스님을 믿고 왔으니 어쨌든 저 스님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서 도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 이까짓 솥을 천번 만번 걸라한들 어떠랴”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큰스님밑에서 공부를 성취해서 유명한 ‘구정선사’가 됐고 후대에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도를 배움에 있어 ‘나’라는 생각은 모조리 버려 오직 법을 위해 내 몸을 돌보지 않을때, 발없는 발이 생겨 길없는 길을 자유롭게 걸어다닐수 있는 것이다. 발없는 발이란 ‘나’가 없는 마음이요, 길 없는 길이란 내게 닥친 어떤 치욕이나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병속에 새 한 마리를 길렀다.
새가 커짐에 따라 병이 너무 작았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병속의 새가 죽을 판이엇다.
자, 병도 깨어서는 안되고, 또 새를 죽여서도 안된다.
이럴때 당신은 어떻게 그 새를 꺼내겠는가?
우리는 이 지구라는 혹은 나라는 병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다.
우주라는 큰스님께서는 항상 나를 말없이 가르치시며 도(道)로써 나를 기르신다.
한 철 살림 해나가면서 때로는 나에게 솥을 몇 번이나 다시 걸게 하여 나의 아상을 갈아 뭉게 버린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마음으로 내 앞에 닥친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제는 탈바꿈해 버린다.
“이것은 고(苦)가 아니다. 우주 라는 큰 스님께서 나를 공부 시키기 위해, 나를 다져주기 위해 내게 주신 공부 재료 다” 하고 받아 들이면 고(苦)는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요, 과정이 된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면, 예전에는 먹고 살기위해 직장도 갖고 장사도 했으나 이제는 나는 수행하기 위해 장사도 하고 직장도 갖으며, 예전에 나는 먹고 사는 것에 집착을 하며 살았으나 이제는 먹고 사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쉬며 여여히 살게되니 고가 고가 아니게 된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있는 자리에서 자기 근기(根器)에 맞게 공부하며 정신적 진화를 거듭한다.
나 하나가 때로는 아버지 노릇도 하고, 아들 노릇도 하고, 남편 노릇도 하고, 주인 노릇도 하고, 하인 노릇도 한다. 이 때 어느 노릇하는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 노릇하는 나를 나라고 할까, 아들 노릇하는 나를 나라고 할까? 아니면 남편 노릇하는 나를 나라고 할까, 주인 노릇·하인 노릇하는 나를 나라고 할까?
우리는 이 수없이 많은 노릇을 하면서도 한 사이 없이 찰라 찰라 놓고 간다. 그래서 ‘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없이 많은 노릇을 노련히 하게 하는 그 자는 누구인가?
당신은 아는가?
그렇다면 말하라. 나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