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치과 치료의 시작
지난 2월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신재의원장의 ‘이야기 치과역사’를 주 1회(목요일자) 게재합니다. 이 칼럼에서는 근대치의학의 도입·수용·발전과정 및 여러가지 일화 등을 재미있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오늘을 성찰할 수 있는 유익한 칼럼이 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한국에 치과치료가 시작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1884년 9월 20일 한국에 처음 온 의사이며 선교사였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관련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체류기(Things Korean)’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이 기록돼 있다. 그 중 ‘의학노트’에 ‘치아’라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는데, 이것은 서양인이 쓴 최초의 한국인에 대한 치과 기록이 된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치아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왔다. 그 사람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치아를 뽑아 버리자고 권하였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당장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나의 처방을 수행하기 위해 나는 능력을 다해 한번에 치아 2개를 뽑아 버렸다. 그날 늦게 내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기가 꺾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치아 1개를 썩은 치아와 같이 뽑아 버렸기 때문에 호된 욕을 먹을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처의 치아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 사람으로 그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치아를 2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는 일이 점점 좋아지게 됐다.
이 글을 통해 한국인은 치과 치료로 치아를 뽑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렌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국소마취약으로 푸로케인을 사용했으니, 국소마취 후 발치가 이뤄진 것이었다. 때문에 그때까지 그와 같이 아프지 않게 발치한 일은 처음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렌이 시술하던 발치감자는 현재 연세대학교 의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이후 만 1년 동안의 알렌의 보고서에 의하면 1885년 4월부터 1886년 4월까지, 충치 60례·구내염 55례·치통 15례, 이외에 구개종양 1례·중설 1례·하악골괴사 치료 6례·구순파열 1례·순열 30례·구강저에서 분리된 혀 1례·구강폐색 3례·협부농양 3례·치아농양 5례·구순궤양 2례·발치 15례의 수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치의학의 외과적 치료가 행해졌다.
신재의 원장 약력
▲72년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 ▲89년 서울시치과의사회사 편찬위원 ▲2003년 서울시치과의사회사 편찬위원장 ▲2004년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82∼현재 대한치과의사학회 총무·부회장·회장 역임, 신재의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