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63)]경성치과의학교의 운동부

2006.01.12 00:00:00

휴식시간에 학생은 삼삼오오 옥외에서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운동장을 갖지 않은 비애가 몸에 사무친다. 원래 스포츠맨인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캐치볼이 시작되고 실습실에는 시간외에 책상을 정리하고 탁구가 시작되었다. 젊은이의 에너지 발산으로는 최상책이다. 방과 후에 코우노 기헤이(河野儀平衛)는 뒤의 송림 속에 있는 대궁장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고 오카다 타다시(岡田正)선생도 동조했다.


오카다 시로(岡田四郞)는 야오 타로(失尾太郞) 선생과 정구코트 만들기를 의논해서 궁장 아래의 송림 안에 좋은 장소를 선정했다. 재빠르게 총독부의원 사무실과 교섭하여 고목은 별도로 하고 입목을 자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 되었다. 선생과 학생이 바라는 테니스코트 건설은 3일도 걸리지 않았다. 원래 송림 안에 평지가 있었다. 저녁을 가르는 백구의 소리도 기분 좋게 라켓을 휘둘렀다. 뒤의 한 그루 작은 소나무가 걸린다. 어떻게 할 수없다. 살아 있는 입목이다. 이 소나무는 한 달 후 말랐다. 고목은 공공연하게 잘라도 되는 것이다. 후에는 쭉쭉 백구를 치고받고 했다.


야구는 캣치볼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 지금은 고인인 된 2회생의 와타나베 미치오가 주장으로 포수가 되어 멤버가 되었다. 홈그라운드를 가지지 않은 비애로 이번 일요일은 용중에서, 내일은 의학전문학교 그라운드, 또는 장충원 등 연습장을 전전하며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습시합도 때때로 했으나, 강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학생의 응원은 진심으로 했고 선수도 열심히 하였다.


“이기거나 지거나”라고 쓰고 싶은데 실제로 학교대항 시합에서는 “지고 또 지고”가 많았다.
오카다 시로(岡田四郞)는 학생시대 토쿄오치전에서 정구부를 창설하고 그 위원이기도 하고 선수이기도 했다. 야구 시합에도 응원을 거르지 않고 갔다. 학교대항시합의 상대로 언제나 뽑히는 것이 토쿄오미술학교로 응원이 볼만 했다. 정구 때도 야구 때도 시합이 시작될 때부터 “져 줘라, 져 줘라”고 입을 모아 외치곤 했다. 정말 아름다운 분위기의 친선 학교대항 시합이었다. 그 때문에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즐거운 분위기에서 스포츠에 빠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경기를 보러가고 학생의 열중한 모습을 보면서 “좋다. 좋다”고 하면서 가끔 시합에 끌려 나갔다가 벤취에 앉곤 했다.


그 후 일로 생각되나 시료병동의 시료환자 진료소 입구를 배경으로 하여 나기라 다쓰미 교장을 중심으로 한 선수들과의 기념사진이 나의 앨범을 지금도 장식하고 있다. 당시의 부속의원의 유리문은 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환자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의 옆 병동 입구가 환자의 출입구였다.


정구는 모두 즐긴 스포츠였지만 탁구는 점차적으로 성장했다. 전 조선학생 탁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하세카와정 본교사가 생기고 난 후인데 학교현관에서 나기라 다쓰미 교장과 타까시마 요시우도(高島義人) 선생, 나, 선수들과 컵을 가진 기념사진과 탁구실 코트에서 우승컵을 놓고 나와 유니폼 차림의 선수들이 찍은 기념사진은 나의 앨범의 제일 소중한 것이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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