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75)]오카다 시로(岡田四郞)와 환자와의 에피소드

2006.03.23 00:00:00


후쿠이 마사루(福井 勝) 선생은 1915∼6년경 도쿄오치전 졸업한 선배였고 후쿠오카현(福岡縣) 타카와(田川)출신이었다.


전혀 미워할 수 없지만 장난기라고 할까, 사람을 부추기도 하고, 들어올리기도 하고, 장난이 지나쳐서 주위에 작은 파란이라도 일어나면 기뻐하는 것이 아이들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오랜 개업의 경험으로 기공이 뛰어나고 특히 금합금의 배합이 자랑이었다. 학자라도 학자 같지 않고 어디까지나 임상가였다. 따라서 연세 든 환자에게는 받아들여지곤 했다.


며칠간 고상한 노부인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 환자의 기공은 대체로 끝났을 텐데.”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의자에서 의자로 따라다니고 있었다.
가끔 내 쪽인지 히라마 켄지(平馬健兒) 선생의 쪽을 힐끗 보고 있었다. 다음날 결혼적령의 딸을 동행해 왔다. 환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상하였다. 머리를 긁으면서 저녁 무렵 돌아갈 즈음 스스로 털어놓았다.


무심코 그만 입을 잘못 놀려서 “저 젊은 두 사람의 선생이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라마 켄지 선생은 몸이 안 좋아서 부인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곤란해. 곤란해.” 하며 혼자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작은 불을 내가 끄겠습니다.” 하고 그 다음날에 여느 때처럼 둘이서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는 곳에 모른체하고 접근해서 내가 말했다.


“희락관의 영화가 좋다고 해서 아내를 데리고 갑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실례합니다.”라고 했다. 그것으로 곤란한 것은 끝을 맺었다.
그날 밤 부인 동반하여 후쿠이 마사루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니 “나한테 환자가 한 눈에 반했다. 화월식당의 여급이 차별하여, 나에게만 좋은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라고 했다.
스스로 불을 켜고 스스로 끌 수 없어서 불을 더 지피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으므로 웃을 뿐이었다.

 

경성치과의학교 선생과 잡기

 

1.
그 무렵 정월에는 트럼프가 성행해 경성치과는 우승후보로 경성일보사 주최의 전조선 트럼프 대회에서는 우승결정전 근처까지 간 것이었다. 나는 전혀 못하여 대회전에 학교의 입원실에서 니시야마 유키오(西山幸男) 선생이 리더로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있는 것을 격려하러 갔을 정도였다. 남자보다 여자가 성적이 좋았다.
마작은 나도 일시 열중했다.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교장 집에서 한두 번 했는데 오히려 그룹이 달랐다. 집에서 4팀으로 계획해 한 적이 있다. 경성고상(京城高商)의 선생 한조, 경성중학(京城中學)의 선생 한조, 용산(龍山) 철도국 한조이고, 학교에서는 니시야마 유키오 선생, 아사노 세이치(淺野淸一), 네모토(根本) 아야꼬 두 조수와 내가 한조였다.


4조 4회전으로 1회마다 다른 사람과 조를 편성하도록 만들었다. 최후에 이르러 8장 넓이의 좌식 다다미방에 가스 스토브와 사람의 온기로 철도국의 시나카와(品川)가 졸도했지만, 유리문과 장지를 열어 공기를 바꿔 넣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만큼 열중하면서 나는 꼴찌였고 아사노 세이치가 어쩐 일인지 상급 입상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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