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역사(89)]경성치과의학교 교수

2006.07.06 00:00:00

그 당시 학생은 조선인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 일본인 중학교 정도라는 학칙이 있었다. 학생 정원은 100명으로 한 학급에 50명이었다.


처음 1년 수신(修身) 경성사범의 교사를 하고 있던 후쿠토미이치로(福富一郞), 기공학 사카가미(坂上), 생리 총독부 의원의 의관이었던 부인과 선생, 병리 의학전문학교의 가나이(金助) 교수였다. 약물 총독부 의원이었던 히라오카(平岡), 외과총론 오가와시게루(小川蕃), 국어 경중의 코바리준키치(小針淳吉), 교정 총독부의원 치과에 있었던 무라사와 코우(村澤胱)가 담임하고 있었다.
조직 의학전문학교 교수 우에다(稙田), 병리 도쿠미츠 요시후(德光美福) 의학전문학교 교수였다. 약리 이케다(池田), 충전학 히로세 분시치(廣瀨文質), 치료학 미시나 케이키치(三品敬吉), 화학 총독부의 약제사 이데미나미 요시지(日南義次)가 1학년의 수업을 끝마쳤다. 학교의 서무회계는 코우노 기헤이(河野儀平衛), 교무관계는 요시나가 테이(吉永 貞)가 맡았다.


2년에는 주간교육이 되어 전임교수를 어떻게든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여 처음으로 1923년 신학기부터 야오 타로(失尾太郞), 오카다 타다시(岡田正)의 2명이 전임교수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의화학 의학전문학교인 이나타 스스무(稻田進) 교수, 충전학 와타나베 마사오(渡邊正雄), 생리 타카나가 준(高永珣 총독부 의원)이 맡게 되었다. 1924년 히라마 켄지(平馬健兒)를 전임교수에 임명하고, 오카다 시로(岡田四郞), 타까시마 요시우도(高島義人), 니시야마 유키오(西山幸男), 이외에 후쿠이 마사루(福井 勝)가 부속병원장으로 들어왔다.


의학전문학교의 직원 혹은 총독부의원의 직원이 전부 희생적으로 경성치과의학교의 겸임교수가 되었다. 겸임교수로 구강외과 기리하라 신이치(桐原眞一), 계통해부학 사카모토 토오키치(坂本藤吉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 약물 오오사와 가츠(大澤勝), 의화학 사토오 코우죠(佐藤剛藏), 내과 시타 노부오(志田信夫), 세균위생학 미즈시마 하루(水島治夫 현 경성대학 교수), 태생조직 카와다 신페이(川田新平), 외과총론 후지모토 진이치(藤本甚一), 약물 마카오 스스무(中尾進 당시 의학전문학교교수), 국어 후치우에 나가토시(淵上長利) 등 이었다.

 

 

경성치과의학교의 예산

 

1922년 개교 당시의 수업료는 35원, 실습료 12원, 합계 42원이었다. 예산으로는 1922년도 결산에 의하면 5210원으로 책정되었다. 처음 1922년 총독부에서 국고보조금으로 1000원을 받았다. 1923년 결산이 1만2000원이었고, 총독부의 보조금이 4000원, 1924년도 결산이 1만8690원이었고, 보조금을 9000원 받았다. 개교 당시부터 이 정도로 보조금을 많이 받은 데에는 요시다 야고에몬 사무관의 힘이 대단히 컸던 것을 나는 감사하였다.


요시다 야고에몬 사무관은 경무국의 전임 촉탁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총독부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협조가 잘 되었고, 또 설립자인 토미다 기사구(富田儀作)는 사이토 미노루(齊藤實) 총독과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관계로 이 학교에 대해서는 학무국 방면에서도 처음부터 대단한 관심을 끌어 점진적으로 이 정도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경성치과의학교에 대해 얼마나 주위에서 관심을 보였고 또한 간접적인 응원이 있었는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출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출판: 참윤퍼블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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