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 119/심야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2007.09.27 00:00:00


‘며칠 전 당신 치과에서
이를 뽑았는데 왼쪽 다리가 쑤신다고
하시더니 전신이 불덩어리가 돼 오늘
밤에는 의식이 왔다 갔다 하신다’

 

치의신보는 현재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인 박종수 원장이 펴낸 치과임상에서 의료 분쟁예방을 위한 사례집 ‘의료사고의 안전벨트’의 책 내용 중 일부를 군자출판사의 협조를 얻어 발췌, 30회 분량을 칼럼화해 지면에 게재키로 했습니다.
이번 칼럼은 나날이 의료분쟁이 급증하는 가운데 수십년 치과 의료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쓴 내용이어서 치협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편집자주>

 


유난히도 무더웠던 어느 여름 날, 한 밤중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치과의사의 집에 심야의 전화벨은 누구의 가슴을 울리는 소리인가?
‘큰일 났습니다. 원장님! 우리 아버지가 당신 병원에서 발치를 했는데 지금 돌아가시게 생겼습니다. 빨리 좀 와주시오’라고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나의 귓전을 때렸다. 아찔했다. 잠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 멀리 날아가 버렸고 순간적으로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속이 갑자기 쓰려 온다. 만성위장염이 다시 도진 모양이다. 사고환자는 어떤 사람인지 누구였었는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환자가 출혈이 심한가? 아니면 통증이 심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투약에 부작용이라도 발생됐단 말인가?


필자의 집에서 골목길로 뛰어가면 몇 분 안 걸리는 거리라고 하니 나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에는 장대비가 동이 채 붓는 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드니 폭우 속에 장애물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 썼던 우산을 팽개쳐 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달리자, 무조건 달리자, 환자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달리기만 하자’고 다짐해 봤지만 내 상념의 나래는 몸이 달려가는 것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고 있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들 하지 않던가. 아니다, ‘인술자의 한 번 실수는 평생 쌓은 공든 탑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라고 하던 선배님의 이야기가 나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일이 자칫 잘못되는 날이면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법정에서는 오라 가라 하겠지. 환자의 눈초리는 어떻고! 이놈, 저놈, 죽일 놈, 살릴 놈! 여기까지 생각하니 온 몸의 힘이 발끝으로 쭉 빠져나감과 동시에 내 몸은 후들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환자의 집을 향해 계속 달렸다.


내 실수가 확실하다면 나는 평생 죄인인 것이다. 평생을 자책하면서 살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다시 속이 불편하기 시작했다. 달려가면서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았다. 요즈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치료에 임했던 환자가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래 최선을 다했으면 된 것이지 내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사람들은 그렇게 너그럽게 보아주지 않을 거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환자는 약자라 해 약자를 보호하고 편들어 주는 것이 정의이며 의리인양 의사들을 매도하는 풍조가 근자의 세상인심인 것을 어쩌랴. 신문지상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대서특필 되겠지. ‘모 치과에서 발치한 노인 사망’. 비난의 소리는 날개를 달고 시중을 메아리쳐 번져나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나의 상상은 꼬리를 물고 불길한 방향으로 비화되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는 중에 나는 환자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디 좀 봅시다.’ 환자를 대하니 기억이 살아난다. 5일 전 쯤 잔근치 한 개를 쉽게 발치했던 71세의 노인 환자였다. ‘어디가 어떻습니까? 어르신!’ 나는 물었다. ‘며칠 전 당신 치과에서 이를 뽑았는데 왼쪽 다리가 쑤신다고 하시더니 전신이 불덩어리가 돼 오늘 밤에는 의식이 왔다 갔다 하신다’고 환자의 아들인 듯한 가족이 대답했다. 나는 환자의 입을 열고 손전지 빛으로 구강 내를 자세히 살폈다. 발치 부위는 부종도 없이 멀쩡하게 치유되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가 우리 진료실을 처음 내원했을 때가 떠올랐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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