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시론 / 장주혜 / Evidence를 찾기 어려운 까닭은

2008.06.30 00:00:00


장주혜<본지 집필위원>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노는 토요일마다 특별한 숙제를 하게 했었다. 한 가지 토픽을 가지고 그에 대한 찬반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데, 적어도 세 가지의 근거를 대야만 했다.
주제는 예를 들어 고가의 브랜드 옷이 좋은가 나쁜가, 나중에 어른이 돼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바람직한가라는 식으로 초등학생들이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다.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관련 서적과 신문기사와 인터넷을 뒤지면서 적어도 한 나절을 보내야만 했다. 어릴 적부터 이런 식으로 evidence based learning으로 무장을 시키다니, 참 세상이 바뀌었군, 감탄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 훌륭한 교육 방법도 시간에 바삐 쫓기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보기 좋은 떡이 되는 모양이었다. 학원 숙제에, 과외 수업에 바쁜 아이들은 대뜸 인터넷을 검색해서 비슷한 내용의 과제물을 찾아서 갖다 붙이거나, 그것도 모자라 아이가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부모들이 팔을 걷어 붙이고 도와 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치과 전문 신문의 광고에서 굵직하게 ‘선배, 레진 시멘트는 뭐가 좋아?" 라고 띄어놓은 문안을 보았던 적이 있다. 청중들을 가득 끌어 들이는 굵직굵직한 세미나에서도 연자의 개인적인 임상경험을 통해 이런 저런 이론을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anecdotal evidence가 과학 현상과 실험에 뒷받침한 scientific evidence에 비해 한 수 아래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초등학생들도 받고 있는 그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우리 세대에게는 자연스러운 지식 습득 행태인 것을 어찌하랴. 어떤 사안이든 즉문 즉답을 원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정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전세계인으로부터 사랑 받는 구글 검색과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이 맥을 못 추는 게 한국이라 하지 않는가. 서양 과학을 가져다 그들의 커리큘럼에 맞춰 교육 받고 현장에 배출된 의료인이지만 그들의 언어로 쓰여진 문헌을 해독해서 소화해 내는 것 또한 쉽지가 않다. 열심히 전공서적을 읽으며 시험 공부를 했고, 영문 문헌을 인용하며 학위 논문을 썼지만, 정작 현장에 나와서는 Q&A 코너에 의존하기를 즐긴다.
치과의사용 ‘지식in" 이라 할 수 있는 모 덴탈 사이트가 2만 명에 가까운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도 놀랄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주말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강연장과 실습장을 향하는 치과의사들은 대한민국의 거대한 사교육 광풍에 일조하고 있다. 그런데 편리하게 포장된 반조리 식품에 든 첨가물처럼 이들 사교육들도 가지가지 제조회사와 판매사의 마케팅으로 뒤범벅이 돼 있어 순수 자연산을 기대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병원으로 돌아와 다시 학교 때 배운 교과서를 뒤적여 보지만 진료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다. 왠지 허전한 마음에서 전화기를 들고 친구에게나 선배에게 요즘 뭐 귀가 솔깃한 사안은 없는지 물어 보게 된다.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남들은 무언가 한참 앞서 나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불안하다. 결국 과거에 비교해서 훌륭한 시설과 교육자료를 가지고 몇 배의 공부를 하지만 매사에 자신이 없는 우리 아이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evidence based dentistry를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남들에게 뒤쳐질 까봐 2년, 3년 앞의 내용을 선행하면서도 학력은 오히려 저하됐다는 우리 아이들과도 견주어 보자.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evidence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자란 세대라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성숙하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참을성을 허락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조급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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