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협 경영정책위원회가 치의신보·치의신보TV와 함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의 위기 및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자는 취지로 우리 사회 저명인사들의 칼럼 시리즈를 격주로 게재합니다. 치과경영 및 치과의료인의 삶에 새로운 자극, 위로와 활력소가 되길 바랍니다.<편집자주>
황 헌 작가
34년간 MBC 기자, 뉴스 앵커, 파리 특파원, 100분토론 진행 등으로 방송 기자 경력을 쌓았고, 현재는 와인채널 유튜브 진행 및 <와인잔에 담긴 인문학> 등 인문학 관련 글을 쓰는 작가이다.
필자는 느림의 철학을 존중한다. 게으름과 느리게 사는 건 다르다. 부지런하면서도 느리게 살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실없이 분주하기만 해선 시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피에르 쌍소는 프랑스의 수필가이자 철학 교수이다. 그가 수년 전에 쓴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는 필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 책 가운데 한 권이다. 쌍소는 느림은 성격이 아니라 선택임을 강조했다. 성격 급한 사람은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마저 허둥대듯 서두른다. 반대로 느긋한 사람은 템포 자체를 느리게 잡는다. 느리게 사는 철학의 의미를 아는 이는 그 철학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한 셈이다. 성격은 급할 수도 있고 느긋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격이 어느 쪽이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은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쌍소는 ‘느림은 성격이 아니라 선택’이라 말하였다.
와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음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슬로우 푸드’이다. 느리게 사는 것의 행복이라는 큰 집합 안에 와인은 훌륭한 부분집합이다. 와인이 슬로우 푸드인 이유는 간명하다.
우선 마시는 방식부터 슬로우 템포가 필수적이다. 맥주나 소주와 맥주를 혼합한 ‘폭탄주’는 이른바 ‘원샷’으로 마시는 경우가 많다. ‘원샷’은 빠르게 취하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거기까지다. 과음으로 이어질 공산이 그만큼 커진다. 그러나 와인은 본질적으로 ‘원샷’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다. 와인은 눈, 코, 입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천천히 음미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음식이다. 급히 마시면 해당 와인만이 지닌 고유의 향을 느낄 수 없다.
다른 술에 비해 와인은 포도 재배에서 수확, 양조, 숙성에 이르는 긴 사이클을 거쳐야만 한다. 그래서 와인은 ‘슬로우 푸드’이자 ‘기다림의 미학을 요구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설렘이다. 기후 조건 좋은 해에 잘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대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좋은 빈티지 와인을 마시기 최적의 시기에 오픈하기 위해 기다리는 설렘은 ‘빨리빨리’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음식과의 하모니 또한 느리게 사는 것의 행복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동시에 중용의 가치 또한 스며들어 있다. 음식은 와인과 좋은 짝을 이룰 때 가치가 극대화된다. 짝짓기는 하모니이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혼인’을 뜻하는 ‘마리아쥬(marriage)’라는 용어를 와인과 음식의 관계에 갖다 붙였다. 중용의 가치는 지나치지 않음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법이다. 식탁에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나왔다고 해서 탐식하는 것을 와인은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채, 본채, 후식마다 그에 맞는 와인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음식, 한 과정에 탐심(貪心)을 갖는 순간 균형은 무너지고 만다. 와인은 식전주, 본식주, 후식주가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데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이 균형점을 잃어버리면 와인 자체가 고유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오는 음식의 맛을 느긋하게 즐기면서 그에 잘 화합하는 와인의 향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중용은 그래서 요구되는 셈이다.
와인이 슬로우 푸드인 네 번째 이유는 와인은 저마다 스토리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소주나 맥주가 스토리를 가진 술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독일이나 벨기에의 작은 가문이 운영하는 수제 맥주의 경우 그 가문만의 내력, 양조의 비법, 맛의 특징 등이 차별화되기 때문에 나름의 스토리를 갖는다. 그러나 일반적 소주나 맥주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제품인 만큼 각각의 병만이 갖는 스토리는 없는 셈이다. 그런데 와인은 참 오묘하다. 같은 피노 누아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이라도 프랑스 부르고뉴산과 미국 오리건산, 남호주산의 맛이 묘하게 차이가 난다. 심지어 같은 부르고뉴 지방의 같은 피노 누아로 만든 레드와인이라 하더라도 밭이 다르고 포도 농사의 노하우와 양조, 발효, 숙성의 전통이 다른 만큼 맛이 달라진다. 심지어 같은 농장에서 같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 하더라도 연도에 따라 맛이 변한다. 바로 와인의 맛에는 자연의 힘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떼루아(기후와 토양)의 차이가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유의 특징을 가진 와인을 접하면서 그 와인의 스토리를 외면한 채 마시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스토리를 알려는 마음 안에 ‘느리게 사는 것’의 행복과 가치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와인 안에 들어있는 폴리페놀이라는 항산화 물질이 우리 몸에 이롭게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슬로우 템포가 요구된다. 과음(過飮)이나 속음(速飮)은 몸에 해로움을 가져다줄 뿐이다.
‘프랑스의 모순(French Paradox)’이란 표현은 1991년 미국의 CBS가 처음 언급해 알려졌다. 내용은 프랑스인들은 다른 유럽 사람들보다 고지방 음식을 많이 먹는데도 불구하고 심장병 사망률이 현저히 낮은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모순은 프랑스인들의 와인 마시기 습관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대표적 슬로우 푸드인 와인을 슬로우 템포로 즐기는 습관이 건강을 보장하는 지름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의 식사는 한편의 작은 드라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재미도 넘치고 긴 시간 이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식이 다양하게 나오기도 하지만 각각의 음식을 담소와 곁들여 느긋하게 하는 그들의 오랜 식습관이 그런 드라마를 만든 셈이다.
요즘 와인 소비는 급증하고 있다. 와인을 접할 기회도 많아지고 있고 와인 상식에 대한 갈증도 커지고 있다. 와인 공부가 쉽지는 않지만, 누구나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열면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와인이 슬로우 푸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익히고 즐겨야 한다는 점이다.
한 잔의 와인 속에는 역사와 철학이 숨 쉬고 있다. 또한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그 한 잔의 와인은 우리에게 늘 선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