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學)은 진주 찾기가 아니라 새 생명을 키우는 것이다

2022.11.09 13:03:36

박병기 칼럼

타인이 저술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정신적 배설물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배설물로 양질의 거름을 만들어 흙에 묻고 그 위에 씨를 뿌려 새로운 생명이 자라게 하는 것이다.(둥근돌의 생각).

 

2016년부터 10월부터 고전 글쓰기를 하고 있다. 논어 첫 문장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 不亦君子乎?” 를 시작으로 대학을 마치고 중용을 중간정도 쓰고 있다. 한문에 대해 전혀 문외한으로 고전을 읽다보니 약간의 욕심이 생겨 조선대학교 평생교육 강좌인 한문 한자 교육과정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 교육과정에 교수님께서 장자를 강의 하신다. 평소 장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중용을 접어두고 장자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고전 글쓰기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오전 9시 30분부터 진료를 하여도 진료를 하지 않는 시간이 태반이 넘는다. 하루에도 몇 번 같은 News를 뒤적인다. 진득하게 책을 읽기도 힘들다. 책을 읽다가 환자가 오면 읽던 책을 접어두고 진료를 하여야 한다. 독서는 리듬이 중요하다. 그럴 때 고전 읽기를 하며 나오는 한자를 써본다, 학(學)자는 臼(절구 구) 爻(효 효, 세상의 모든 일) 冖(덮을 멱) 子(아들 자)로 구성되어 있다. 學은 스승에게 일방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들이 토론을 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논어 : 躬(궁)

子曰 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은 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랴? 그러나 군자의 도를 몸소 실천함은 가능함이 있지 못하다”)에서 躬자가 나온다. 躬(몸 궁)은 身(몸 신)+弓(활 궁)이 조합된 한자이다. 내 몸이 화살이라면 “내 몸의 활이 되어 본적이 있는가? 자문해 본다.

 

어린 시절 내 몸의 주인은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하기위해 내 의지와 다른 행동들을 하였다. 그리고 성장하며 타인들의 시선이 내 몸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가 아닌 부모님과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였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본적도 없었다. 고민해 본적이 없기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치과대학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내 몸의 주인은 배우자, 자녀, 재물 등등 접하는 모든 것이 몸의 주인이 되었다. 내가 아닌 타인이 내 몸의 주인라고 느낄 때 가슴 곳곳에는 No라고 외치고 싶었다. 가끔 사람들이 없는 외진 곳에서 그냥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꼈다. 그것도 한순간. 궁(躬)에 빠져 한 달을 보내며 이제 ‘No’라는 말을 할 수 있다. No라 말할 수 있기에 타인의 ‘No’라는 말에 상처 받지 않는다. 타인이 10리를 가자고 할 때 싫은데도 따라가면 종이지만 내가 20리를 같이 가주면 내가 주인이라는 법륜스님의 강의가 생각난다. 같이 가기 싫으면 ‘No’라고 말한다.

 

대학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하루를 새롭게 바꾸면, 매일 새롭게 바꾸고, 새로운 것도 또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新(새로울 신)자가 핵심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新(신)자는 木(나무 목)+立(설 립)+斤(도끼 근)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있는 (살아 있는)나무를 도끼로 찍어 나무가 죽었을 때 가구나 집 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무는 생명을 잃는 고통이 동반되었을 때 새로워지는 것이다. 고통을 이기는 것은 약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즐길 수 있는 꿈이 있기에 가능하다.

 

나에게 새로워지기 위해 고통을 즐길 수 있는 꿈이 있는가? 나는 치과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치과의사가 되었다.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30년을 치과의사라는 갑옷을 입고 살고 있다. 고전 글쓰기를 하며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아졌다. 꿈이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일상에서 벗어나야 새로워진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만나는 사람을 바꿔라’ 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中庸

서양의 저울은 대상의 무게를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무게의 측정도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저울추의 다양성이 상실되었을 때 측정이 불가능하다. 동양의 저울은 측정 범위 내에서 중심을 이동하여 측정할 수 있다. 10개의 빵을 10명에게 나누어준다는 가정아래 필자는 서양의 중용은 한명에게 1개의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동양의 중용은 배고픈 사람에게 더 많은 빵을 나누어주는 행위를 말한다. 중용은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중용은 배려이다.

 

莊子

장자는 ‘북극바다 심해에 수 천리 크기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붕(鵬)이라는 수 천리 크기의 새가 되어 태풍이 불어(스스로 날 수 없기에) 구만리 상공까지 올라 육 개월을 바람에 몸을 싣고 날아가 남극에 도달 한다’ 는 황당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곤(鯤)의 사전적 뜻은 ‘1. 곤이(鯤鮞) 2. 물고기 이름 3. 물고기 뱃속에 있는 알 4. 북극 바다에 산다는 어마어마하게 큰 고기’ 이다. 물고기가 한 번에 낳는 알의 개수는 다양하다. 80개의 알을 낳는 해마가 있는가 하면 개복치는 한번에 3억개의 알을 낳는다.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나는 원인은 육아법의 차이에 있다. 곤이 몇 개의 알을 낳는지는 모르지만 곤의 알이 모두가 곤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곤의 알이 아니면 곤이 될 수 없다.

 

나는 곤(鯤)의 알인가? 아니면 개복치 알인가? 자문해 본다.

 

논어 학이편 첫 문장에 인부지불이온(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에서 자는 心(마음 심) 囚(가둘, 죄인 수) 皿(그릇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인에게 그릇에 밥을 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하지만 성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慍(성낼 온)자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죄인이라면 피해자와 그 가족이 있을 것이다. 엄벌을 처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수령이 죄인에게 그릇에 밥을 준다. 그 행위를 피해자와 가족이 보았을 때 화가 날것이다. 죄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릇에 밥을 줄려면 반찬과 따뜻한 국물도 줄 것이지 밥만 주니 화가 난다. 수령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주먹밥을 그냥 던져 준 것도 고마워해야 할 터인데 그릇에 밥을 주었는데 죄인이 불평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날것이다.

 

중용이란 나의 관점이 아닌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중용은 지식(知, 알 지)이 아니라 지혜(智, 지혜 지)가 필요한 행위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병기 함께하는 대덕치과의원 원장
Copyright @2013 치의신보 Corp. All rights reserved.



주소 서울시 성동구 광나루로 257(송정동) 대한치과의사협회 회관 3층 | 등록번호 : 서울,아52234 | 등록일자 : 2019.03.25 | 발행인 박태근 | 편집인 한진규 | 대표전화 02-2024-9200 FAX 02-468-4653 | 편집국 02-2024-9210 광고관리국 02-2024-9290 Copyright © 치의신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