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 등록 2024.08.28 15:5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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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칼럼

터닝 포인트 : 중대한 분기점으로,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나 그 지점을 뜻한다. (구글)


인생이나 사건에서 중요한 변화나 전환이 일어나는 시점을 의미한다. 이 시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바뀌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어 이후의 삶이나 일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쳇GPT)  당신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언제였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또 미래의 터닝 포인트를 준비하고 있는가? 구본형 등이 쓴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에서는 나를 찾는 6가지 방법에 대해 말한다. ‘산맥타기’를 통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고민해 보았다. 나에게는 우연히 찾아온 터닝 포인트와 준비된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산맥타기’ 방법은 가로축은 시기별로 기억되는 사건을 적고 세로축은 그 당시를 기억하며 ‘0’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긴다. 내 인생 그래프에서는 ( - ) 보다 ( + )가 많다. 나의 부모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고, 그 부모님이 이루어준 형제들과 같이 자랐다는 것은 두 번째 행운이다. 산맥타기 방법을 통해 내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았다. 막연히 기억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썼다. 손무의 손자병법에서 지피지기 백전백승( 知彼知己, 百戰不勝)이라고 했다.
 
14살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버님께서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아버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시의 호두를 가지고 다니셨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에게 손목시계를 자랑하며 놀다 집에 가려고 정신을 차려보니 손목이 허전했다. 시계를 선물 받은 지 2달도 되지 않았다. 시계를 분실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님에게 혼이 날거라는 생각에 어두워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동생 둘을 동원하여 시계를 찾았다. 놀이터 어디에도 시계는 없었다. 그 순간 ‘시계를 주운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분실을 인정하니 대안이 떠올랐다. 세 명의 누나들에게 시계분실을 알리고 돈을 걷어서 비슷한 시계를 구매했다. 그 시계도 얼마가지 못해 분실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는 시계를 차지 않았다. 그래프를 그릴 당시의 점수는 ‘0점’이었으나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 보니 ‘80점’은 된 것 같다. 시계분실 사건을 통해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잊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성적은 그리 좋지를 않았다. 겨우 서울 근교에 있는 공과대학을 지원할 정도랄까. 지방 대학은 다니기 싫었다. 수능이 끝나고 서울 근교 ○○공과대학에 원서를 내려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담임 선생님(임호연 선생님)께서는 서울에 있는 치과대학에 원서를 내라고 하신다. 지방 치과대학에 원서를 낼 수 없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치과대학이라니! 임호연 선생님께서는 지방의 치과대학은 미달이 없는데 서울에 있는 치과대학은 미달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시며 아버님과 상의할테니 원서는 연필로 쓰고 가라고 하셨다. 미달은 없었다. 재수를 하고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어! 나도 꿈을 갖고 노력하면 되는구나.’ 나의 잠재력을 믿고 응원해 주신 임호연 선생님과 아버님께 감사드린다.


대학에 입학하고 조선대학교 백악사진 예술동우회(한나래)에 가입하여 사진 활동을 하였다. 사진반 동기들 중에서 중간 정도 실력이었지만 치과 대학에서는 사진하면 박병기로 통했다. 치과대학 모든 행사에서 카메라맨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 선거에 나가서 떨어진 후 나는 늘 그늘 속의 해시계였다. 아니 내가 해시계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선배님들의 결혼사진을 촬영해 드렸다. 본3이 되어서는 교수님이 임상사진을 찍을 때 방송으로 호출을 하신다. 사진 활동을 통해 그늘 속의 해시계가 그늘을 벗어나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


1993년 광주에 치과를 개업하고 환자의 치료 전, 후 사진을 찍어 빔 프로젝트를 활용하여 상담을 하였다. ‘hwp’로 편집을 하여 대기실에 놔두었다. 10년 정도 자료를 정리하여 상담용 책을 출판하고 싶었다. 1993년 개업을 하고 늦공부가 터질 때 나래출판사 최원요 사장님께서 치과에 임상서적을 가져오셨다. 1997년 대기실에 있는 ‘상담용 hwp’를 보시더니 출판을 하자고 하신다. 1998년 ‘환자와 함께하는 치과이야기’를 출판했다.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며 느꼈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며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3~4년 정도 준비하면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상담용 책을 출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판하고 바로 개정판을 준비하였다. 11개월 만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당시 출판사 사장님과의 인연이 나를 저자로 만들어 주었다.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은 당첨될 수 없다.


2000년 ‘7가지 성공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치의신보에 글을 썼다. 그리고 그동안 찍어두었던 사진을 치의신보 ‘여백’에 실었다. 2015년 치의신보 집필진이 되어 정기적으로 ‘논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0년 정도 신문에 기고를 하여 그 글들을 모아 61세에는 책을 출판하고 싶었다. 나는 120세까지 살아야 이룰 수 있는 꿈이 있다. 120세 인생에서 61세는 인생의 진정한 터닝 포인트이다. ‘나는? 나는!’ 제목으로 9월 말에 책이 나올 것이다. 그동안 치의신보와 치과신문에 연재하였던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 삶의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21권의 책을 소개한 글들이다. 


10년 이상을 준비하고 진행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목표가 있기에 목표를 향해 거북이처럼 땅만 보고 걷는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병기 함께하는 대덕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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