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달 전 아무나 붙잡고 드라마 뭐 보냐고 물으면 열에 일곱은 중증외상센터라 답할 정도로 붐이었던 것 같다. 드라마에 메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백강혁 교수는 죽어가는 환자도 벌떡 살려내는 그야말로 현대판 화타 그 자체다. 그리고 함께 등장하는 ‘1호’ 양재원 전공의는 어딘가 부족해보이지만 백강혁 교수 옆에서 점차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회차 내내 보여주는데, 두 사람의 케미를 보고있자면 어느새 시즌 끝까지 정주행해버리게 될 정도로 보는 사람을 드라마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것 같다.
지난한 공부와 실습 끝에 올해 드디어 치과대학을 졸업했고, 치과의사 국가고시에 무사히 합격했다. 당초 계획은 졸업까지 달려온 나 자신을 위해 몇 달간 휴식기간을 가진 뒤 페이닥터를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졸업하고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지인으로부터 수원에 페이닥터 공고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집에서 불과 15분 거리임을 알고는 당장 이력서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원장님으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회신을 받았고,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지도교수님과 선배들이 항상 입이 닳도록 해주신 말이 있었다. 수련 없이 바로 페이닥터로 일하게 되면 첫 직장이 정말 중요하니, 조금이라도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면접보러 가는 곳이 내가 원하는 곳과 부합할지 걱정이 한가득 이었다.
그러나 대표원장님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걱정했던 내가 우스워보일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물론 집에서 치과까지 거리가 말도 안되게 가깝기도 했지만, 원장님께서 A to Z로 웬만한 로컬의 진료를 모두 알려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크게 이끌렸다. 곧이어 원장님께서 같이 일하자고 호쾌하게 제안하셨고, 거기에 화답하듯 나도 흔쾌히 수락하여 부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되었다.
대표원장님은 보철과를 수련한 전문의셨고, 이 자리에서 30년을 쭉 진료해오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술식의 속도나 정확도가 말도 안 되었다. 당일 대구치 프렙 후 인상 및 임시치아 제작, 세팅까지 40분을 넘는 경우가 없었는데, 누가 그랬던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라고. 우리 치과가 위치한 도로에 다른 치과만 9개가 있는데, 이 쟁쟁한 곳에서 30년간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중증외상센터 드라마처럼 촌각을 다투며 진료하진 않아도, 초년차인 내 눈에 대표원장님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여자 백강혁 그 자체였다. 거기에 정말 드라마와 똑 닮은 원장님의 한마디 “이렇게 슥슥슥, 어때요? 별 거 없죠?”
매번 놀라고 있는 내 모습에, 대표원장님은 멋쩍으신 듯 다른 원장님들이 당신보다 수십 배는 더 잘한다는 말씀과 함께 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 격려해주시곤 한다. 과연 나도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싶지만,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간 발끝 정도에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대표원장님께서 페이닥터를 단 한번도 고용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료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세세히 잘 알려주시기도 하고, 술식이 막힐 때마다 능숙하게 도와주시는 터라 분명 많은 페이닥터들과 일하셨을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랐다. 그래서인지, 내가 대표원장님에게 있어서 ‘1호’ 페이닥터라는 묘한 책임감에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준비하거나, 진료가 끝나고 발거치에 연습하는 등 최대한 대표원장님께 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는 것 같다.
어느덧 여기서 일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아직도 환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서투른 부분이 많고, 술식 과정에서 고민이 생기는 지점이 많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치과를 출근하는 길이 즐겁고 기대되는 것은 대표원장님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처럼 이렇게 주어진 진료를 묵묵히 해나가고 부족했던 부분을 치열하게 고민하다보면 언젠간 나도 누군가에게 든든한 1호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지금의 대표원장님에게 1호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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