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부츠(John. L. Boots)는 인적 구성과 체제에 변동의 시기에 쉐프리의 뒤를 이어 세브란스병원 치과 과장이 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수를 겸직하게 됐다. 1921년 10월 세브란스병원 치과에 부임한 맥안리스(James. A. McAnlis)는 부츠를 돕고 있었고, 192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임택룡(林澤龍)이 조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츠는 1894년 11월 9일 미국 펜실바니아 뉴브링톤에서 출생했다. 1918년 피츠버그치과대학 3년 과정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 임상강사로 재직하다가 1921년 3월 선교사가 돼 한국에 왔다. 부츠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갈 때마다 졸업후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치과의사로서의 자질을 높이도록 노력했다. 또한 그는 치과치료에 있어서 구강외과학 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부츠는 창의적인 기획능력과 추진력, 외교적 수완을 지니고 있었으며, 치과의 책임자로서 치과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치의학의 교육, 진료, 장기적으로 치과를 독립시키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외에도 대외적인 회의에 참석해 치과의 위상을 높이고, 대내적으로 교직원 및 학생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일도 그의 공식적인 업무중의 하나였다.
맥안리스는 1921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해 1921년 10월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에서 부츠를 돕는 조수로 있었다. 맥안리스는 20년간 한국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남긴 보고서나 기록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는 조용하고 개인적인 성품을 지녔으며 성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전문적인 능력과 체계적인 가치 판단으로 강력하게 일을 추진했다.
부츠는 맥안리스와 함께 우선 의과대학의 일부로서 치과학 강의를 하며 치과 치료에 임했다. 강의는 3학년에 있었고, 임상강의는 4학년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외래환자 임상강의는 정해진 시간 없이 필요한 때에 이루어졌다.
부츠와 맥안리스는 자신들을 도울 한국인 직원을 선발했다. 선발 기준은 전문적 능력과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국인으로 1923년 김(Dr. Kim)을 채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부츠와 맥안리스, 그리고 함께 했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 직원들은 한국의 치의학계 발전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다.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 교육내용은 독자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첫째, 미국식 치과의술을 익혀 통일적인 진료을 하도록 했다. 둘째, 치과 내에서 전문 분야별로 공부하도록 했다. 셋째, 치과 운영과 치의학 교육을 할 수 있게 능력을 배양시켰다. 넷째, 한국의 치의학계 지도자를 양성했다.
부츠와 맥안리스는 미국 최신 치료법의 도입에 힘을 썼다. 부츠가 안식년에 졸업후과정에 참가한 것 뿐만 아니라 맥안리스는 근관(根管)치료에서 근첨까지 완전히 밀봉되게 하는 선진적인 치료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보철 시술은 구강내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 병리학 등 구강조직의 기능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이유경, 정보라, 박용덕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그 후 1935년 이유경은 피츠버그대학교 치과대학를 졸업했고, 정보라가 노스웨스턴 치과대학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해 총의치에 대한 졸업후과정도 이수하게 됐다.
부츠가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 왔을 때는 시설이 매우 빈약했다. 그는 늘어나고 있는 치과환자를 치료하고, 선교사업을 강화시키기 위해 ‘치과센터’ 설립계획을 수립했다. 1925년 12월 이러한 건물 신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부츠는 미국 선교본부와 미국치과의사협회 승인 아래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애심을 호소하며, 치과의사들에게는 10달러 짜리 ‘벽돌 만개 팔기’라는 모금운동을 했다. 그 결과 현금 8000달러와 2000달러 이상을 약속 받았다.
부츠는 ‘치과센터’ 계획을 미국치과의사협회에 상정해 승인을 받았다. 이것은 서울이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중앙에 위치하므로 아시아 치과의료 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고, 또한 미국의 과학적인 치과진료를 제공하며,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 치의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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