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부분만 보고 그것이 전체인 줄 알면 사물의 전체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장님들이 자기의 주장만 하지 않고, 동료 장님의 의견을 들어준다면 어떠할까? 각자가 코끼리의 부분을 손으로 만져 느낀 점을 하나로 뭉쳐 그려본다면, 비록 눈이 멀쩡한 사람과 같이 완전한 모습을 그리지는 못할지라도, 코끼리 일부의 국한된 한 가지 모양에서 벗어나, 좀 더 근사한 코끼리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해 코끼리가 아닌 모양을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에서 조금은 벗어 날 수가 있지 않을까?
자기의 주장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의 주장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고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의 주장이 완전하지 못함을 아는 것에 그치면 자칫 자기의 주장에 집착하게 돼 억지 주장을 하기가 쉽다. 그래서 결국은 논쟁에서 벗어나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상대편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게 된다. 인신공격을 하는 이들을 보면, 자기의 주장을 자신의 존재에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기의 주장과 자신의 존재를 동일시함으로써 주장에 대한 반론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기에 아는 것 뿐 만 아니라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자기 것 이외의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이 완전으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기의 주장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 장님이 만져 알게 된 코끼리의 모습은 분명 코끼리(의 일부)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자기가 만져 알게 된 그 모습을 버리고 남의 것만을 취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것이 되기 쉽다. 그러기에 자기의 것과 함께 남의 것을 취해야 한다. 남의 것을 취함과 함께 자기의 몫에서의 충실함도 중요하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 남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불완전한 나를 남이 불완전한 채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상대의 불완전함을 보았을 때 대개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불완전한 모양을 비난하기가 쉽다. 더욱이 상대가 자신의 주장에 집착을 보일 때 무시나 비난의 정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순간 불완전한 내 주장에 집착했던 나의 과거의 모습이 어리석었음을 인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주장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아량이 생긴다.
사실 우리는, 코끼리를 대하는 장님과 같이, 세상사를 부분으로 밖에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부분을 보고 마치 전체를 보고 아는 양 주장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하지 않을는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서로의 주장을 받아들여줄 때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전에 더욱 가깝게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비록 세상사에 대해 완전한 판단은 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