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紅梅)를 심은 뜻

2015.05.12 13:29:58

월요시론

서울을 도읍으로 삼은 지 600년이 넘었으니 시내 동네, 골목 어디 한군데라도 오랜 역사의 자취가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근현대사의 굴곡과 혼란으로 말미암아 궁궐 같은 덩치큰 일부를 빼곤 그 많은 흔적들이 대부분 뭉개지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변명이라도 하듯 무언의 표지석이 한편에 앉아서 텅빈 흔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관심을 갖고 보면 성내라고 불린 사대문 안에는 이런 표지석이 의외로 많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필자가 근무하는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는 창경궁과 맞닿은 곳이라 여느 성내 마을에 못지않게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옛 창경국민학교를 허물고 지은 치과병원 자리도 예외는 아니다. 병원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 따르면 이곳은 조선 세조때 뛰어난 관리이며 큰 학자인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이 살던 집터였다.

그는 진사, 생원, 문과의 과거시험에서 연속 장원급제하였으며, 요직인 집현전을 거쳐 한성부윤, 대사헌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뜰 한가운데 작은 연못을 파고 그 옆에다 이엉을 얹은 정자를 짓고는 계일정(戒溢亭)이라 이름하였다. 후손더러 명성과 권력, 재물과 복을 얻는 데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경계하라는 뜻에서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들였던 것이다.

과연 작은 정자에 새긴 그의 선비정신이 주효하였는지 4대가 지나자 17세기 조선 최고명문에 꼽히는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집안이 탄생하게 된다. 이정귀와 아들 명한(明漢), 손자 일상(一相) 3대가 모두 대제학에 올랐으니, 명문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집안에는 학문적 명성 말고도 또하나 유명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홍매(紅梅)였다. 홍매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이 전하고 있는데, 이 홍매는 원래 명나라 신종황제가 감상하던 것이었다고 한다. 어사 웅화(熊化)가 황제의 명으로 시를 지어 바치고 상으로 홍매를 하사받았는데, 북경에 사신으로 간 이정귀가 그와 내기바둑을 두어 이를 얻어왔다. 소문을 들은 조선 각지의 선비들이 이 홍매 얻기를 간구하였고, 어렵게 얻은 이들은 기쁜 마음을 시로써 남기기도 하였다.

서울대 국문과 이종묵 교수는 ‘문헌과 해석’ 2010년 봄호에 ‘조선의 명품 매화-이정귀의 홍매’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그는 양생을 소홀히 한 탓이었는지 오랜 기간에 걸친 치과치료를 받으러 서울대치과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한국한문학 전공인 그는 진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서울대치과병원 근처에 있었다는 이석형의 계일정과 이정귀의 홍매에 관한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석형 집터는 표지석으로 남아 이야기를 전해주지만, 이정귀의 홍매는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치과병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홍매가 제격일 거라는 귀띔과 함께.

매화는 이른 봄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어떤 꽃보다 먼저 피어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단아한 동양미를 품고 있기에 여러 문인묵객(文人墨客)의 더없는 벗이었으며, 추위를 이겨내고 꽃이 피기에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의연한 선비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원에 두어 완상하면서 고결한 심성과 강인한 기상을 다지기엔 더없는 맑은 벗, 청우(淸友)였던 것이다.

지난 4월 중순 홍매 세 그루를 구하여 병원 입구 ‘치과의사윤리선언’ 석조물 옆에 심었다. 가지가 성근 어린 벗이지만 예스러운 등걸의 태가 벌써부터 농한 매화향을 뿜을 고목의 자질을 지녔다. 그 앞을 오가는 학생, 의료진과 환자들의 몸과 마음이 그윽한 홍매 향기와 더불어 한층 맑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내가 홍매를 심은 뜻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구 영 서울치대 치주과 교수

구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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