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음악(標題音樂; Program Music)

2022.04.27 14:00:19

임철중 칼럼

고교 음악 시간에 절대음악을 표제음악보다 상위 개념으로 배웠다. 강의 내용을 떠나 절대와 표제(absolute Vs. program)라는 단어 자체가 마치 순수와 현실(日常)의 대비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작곡가가 어떤 개념에 몰입하지 않은 채 창작한다는 전제에 저항감이 온다. 절대음악도 듣는 사람이 나름의 상념을 머릿속에 그린다는 점에서, 제목 없는 추상화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작곡가의 의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표제음악의 정수(精髓)로 엘가의 수수께끼,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그리고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 있다. 분명한 대상이 있는 소품 모음곡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퀴즈를 곁들여 즐길 수 있는 기악곡들이다. 금난새 지휘자의 ‘해설이 있는 동물의 사육제’를 3년 사이에 두 번 보았다. 티켓파워를 증명하듯 좌석은 물론 만석. 14곡에 나오는 12 동물(화석과 피날레 제외)을, 곡마다 모티브와 클라이막스를 골라 미리 들려주며 몸 개그로 해설하는 열정은 언제 보아도 즐겁다.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 5인의 한사람인 무소르그스키(1839-1881)의 ‘전람회의 그림’도 좋다. 절친이자 건축가-화가인 하르트만이 39세로 요절하자, 추모 전시회에서 본 열 개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피아노곡(라벨이 관현악으로 편곡).

 

한 그림에서 다음으로 이동하는 프롬나드 5곡까지, 그림과 같은 묘사가 강렬하다.

열 번째 곡 ‘키에프의 대문*’은 하르트만의 ‘디자인 스케치’ 작품으로, 최근 러시아에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상징으로 그림이 뜨고 있다.

 

음악회에서 배가 부르면 졸음의 원인이 되지만, 필자는 허기진 배로는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감상하는 시간과 그림 사이의 이동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회장에는 등판 없는 벤치가 곳곳에 놓여있다. 은퇴하기에 앞서 사진과 앨범을 거의 다 없앴는데, 살아남은 몇 장중에, 교정학계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고 Roth와 Williams와 우리 부부가 함께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1996년 Toronto의 R/W 세미나 당시 리셉션 장소였던 온타리오 미술관(Gallery of Art, Ontario)인데, 구내식당이 꽤 고급이었다(decent restaurant). 세계 어디를 가나 미술관-박물관을 입장료 수입만으로 흑자운영 하기는 어려워서, 식당이나 구내매점(Gift Shop)을 운영하고, 정부나 애호가로부터 후원을 받는다. 첨단의 제지산업과 인쇄술로 우리나라 전시회 도록(圖錄)은 초일류다.

 

예술의 전당 구내식당에서 모임을 하고, 샵에 들려 도록과 ‘별이 빛나는 밤’이 인쇄된 넥타이나 스카프 우산을 사면, 우리는 사실상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셈이다. 작년 우리 GDP가 $35,000을 넘어섰다고 한다. “정부가 잘해서”라면 천하가 웃을 일이요, 말 잘 듣는 국민과 산업 역군들의 분투, 그리고 K로 표시되는 문화예술의 후광과 이미지 업그레이드가 바로 일등 공로자들이다.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1층에 한식 카페 ‘담’이 있다. 딸 내외와 부부 넷이서 저녁을 시켰다. 은갈치구이 2인에 고등어조림 2인분. 제 키에 맞춰 두 자는 채 못 되고 자가웃은 넘는 백자에 눕혀 나온 은갈치는, 곰살궂게 잘 발라 가시도 없거니와, 노릇노릇 슴슴하게 잘 구어 식감도 탱글거린다. 고소하고 짭쪼롬한 고등어조림도 버릴 것이 없고, 시골 토장 냄새가 풋풋한 된장하며... 맛뵈기로 쬐그만 삼겹살 수육에 너비아니까지 한쪽씩 곁들인 풍성한 한식 저녁이 두당 $20 정도라니...

 

서예는 잘 모르지만 동북아 3국 중 한국의 한자가 가장 곱고 안정감이 포근하다.

상형문자가 우리 손을 거쳐 꽃을 피운 것이다. 필자의 서재에 있는 편액이 추사를 옮긴 것이라는데, 노규황량사(露葵黃粱社) 다섯 글자마다 여덟 8자(八字) 획이 죄다 다르면서도, 기이하게도 아름다운 균형을 이룬다. 또한 표음문자 한글은 그 옛날에 AI 시대를 미리 알고 만들었다는 듯, 현대적-기호학적인 조형미를 뽐내지 않는가?

 

코로나 탓으로 잠시 막혀 있지만, 치과계에도 국제교류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

외국 친구들이 찾아오면 우리 미술관, 콘서트홀에 초대하자. 서예관(Calligraphy)도 자랑하고, 맛 나는 한식 요리도 대접하자. 예술과 문화는 일상에서 그리 멀지 않다. 가까이 할수록 자신의 품격과 국격이 높아지고, 소득증대는 덤으로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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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보 이름 ‘키에프 大門’을 ‘키이우’로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썼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철중 치협 대의원총회 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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