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기반의학(evidence based medicine)과 근거를 고려한 정책(evidence informed policy)

2022.07.26 13:34:11

정회인 칼럼

근거기반치의학(evidence based dentistry)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들린 것도 한참 되었다. 1992년 캐나다 맥마스터대학교 임상역학 및 생물통계학교실의 고든 기얏(Gordon Guyatt)이 미국의사협회지의 편집인 드러몬드 레니(Drummond Rennie)와 함께 사반세기를 거쳐 정립해 온 의학논문에 대한 비평적 읽기(critical appraisal) 방법론에 근거기반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붙인 이래1)2) 근거기반의학은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걸쳐 큰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근거기반의학은 의료진의 임상적 전문성과 환자의 가치에 최상의 연구 근거를 결합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1996년 데이비드 사켓(David Sackett)이 ‘현존하는 최선의 근거를 성실하고 명료하고 현명하게 사용하여 각 환자의 치료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the conscientious, explicit, and judicious use of current best evidence in making decisions about the care of individual patients)’이라고 정의하였다3). 임상적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의료진이 임상적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여 환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고려해서 여러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관련성이 높고 신뢰할만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신뢰할만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 무작위배정 대조군 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이하 RCT)과 다수의 RCT들을 종합하여 요약한 결과를 제공하는 체계적 문헌고찰(Sytematic reviews, 이하 SR)이 풍성하게 발표된 질환 또는 약제일수록 근거기반의학을 실행하기 용이해지며, 중요한 임상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최선의 근거를 바탕으로 정리하는 근거기반 임상진료지침(evidence based clinical guideline)이 존재하는 경우 매우 편리하게 근거기반의학을 적용할 수 있다.

 

근거의 남용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근거기반의학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1995년 그림리 에반스(J. Grimley Evans)는 영국의사협회지에 실린 “근거-기반 그리고 근거-편견의학(Evidence-based and evidence-biased medicine.)”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기 환자에게 명확히 적용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을 때 임상가는 두려움을 갖는다. 이에,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치료법을 다른 환자, 장소, 시간에 적용한 결과에 바탕을 둔, 적절성이 의심되는 근거라도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강박 행동을 유발한다. 이것은 근거-편견 의학이며, 마치 다른 곳에서 열쇠를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로등이 거기에 있다는 이유로 그 밑에서 찾아 헤매는 술주정꾼의 행위와 다름없는 근거의 이용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라는 매우 적절한 비판을 하였다. 근거기반의학이 원래의 취지에 따라서 바르게 수행되기 위해서는 임상가의 지식, 경험, 직관에 의한 높은 전문성과 환자의 여건, 선호, 가치관이 잘 어우러진 의사결정과 함께, 마치 초점이 잘 맞추어진 빛처럼 현재 진행되는 특정 상황에 적합한 과학적 연구 결과가 이미 발표되어 있어야 한다.

 

의료계에서 제안한 근거기반의학의 원리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위한 방법으로써 근거기반보건의료(evidence based healthcare), 근거기반정책(evidence based policy) 등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 중 근거기반정책은 특정 질환이나 문제에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중재에 대한 최선의 근거를 정책적 의사결정에 숙고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근거기반정책은 건강보험 관련 분야부터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공중보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근거기반의학과 마찬가지로 근거기반정책도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의사결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환자 개인이 아닌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공공정책을 다루며 적용에 있어 환자의 가치와 비교할 때 훨씬 더 다양하고 첨예하게 충돌하는 사회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5).

 

근거의 남용에 대한 우려는 근거기반정책에서 더 강하게 제기된다. 과학적 근거가 정책 결정에 필요한 모든 면을 담기는 어렵다. 신뢰할 만한 근거일지라도 정책 결정에 이용되기에는 편파적일 수 있고 맥락에 따라서 복수의 해석이 가능하므로, 근거기반의학과 같은 방식으로 정책 결정에 근거를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적어도 정책 결정은 이성적 실행일 뿐 아니라 무엇이 정당하고 합리적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논쟁의 과정이기 때문에 근거만으로는 정책 결정이 어렵다. 심지어는 정부나 정치권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할 때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근거를 사실상 취사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에 기초했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가 없다고 방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6).

 

정책 결정에서 근거를 바라보고 활용하는 시각에 대해서 WHO가 국제보건 영역에서 활용하고 있는 근거고려정책(evidence informed policy) 또는 근거고려의사결정(evidence informed decision making)을 참고할만하다. 제한적인 자원을 이용하여 의료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비용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므로 연구 결과를 의사결정에 활용해야 한다는 관점은 근거기반정책과 같다. 하지만 근거고려정책은 정책이 수행되는 방식이 다양하며 의사결정의 종류와 특정한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정책이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근거기반정책이 주장한다면, 정책 결정시 근거를 잘 검토해야 한다고 근거고려정책은 주장한다. 또한 정책 결정에서 근거에 대한 접근과 평가가 체계적이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데 근거고려정책은 강조점을 둔다. 이를 통해 정책 결정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어떠한 연구 근거가 정책 결정에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근거와 해석에 대해 어떠한 판단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도록 한다.

 

근거라는 말은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근거기반의학의 원리는 의료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질 높은 근거의 마련도 중요하지만, 현존하는 근거들이 임상 현장, 정책 결정등 다양한 맥락에서 더욱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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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Zimerman AL. Evidence-based medicine: a short history of a modern medical movement. Virtual Mentor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of Ethics). 2013 Jan 1;15(1):71-6.

2) Evidence-Based Medicine Working Group. Evidence-based medicine. A new approach to teaching the practice of medicine. JAMA. 1992 Nov 4;268(17):2420-5.

3) Sackett DL, Rosenberg WM, Gray JA, Haynes RB, Richardson WS. Evidence based medicine: what it is and what it isn’t. BMJ. 1996 Jan 13;312(7023):71-2.

4) Evans JG. Evidence-based and evidence-biased medicine. Age Ageing. 1995 Nov;24(6):461-3.

5) 김남순, 이희영, 서현주, 박은자, 채수미, 최지희. 근거중심보건의료에 대한 정책분석과 개선방안.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2

6) Parsons W. From Muddling Through to Muddling Up - Evidence Based Policy Making and the Modernisation of British Government. Public Policy and Administration. 2002;17(3):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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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인 연세치대 예방치과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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