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치대 100주년과 ‘토지’

2022.10.26 16:04:58

Relay Essay 제2524번째

요즘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올 초 4개월 간에 걸쳐 통독한 ‘토지’의 마지막 문장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가 떠오른다. 올 여름 서울치대 박물관장님이 전화를 주셔서, 올 봄에 경기도치과의사회의 유물을 이관 받았는데 외조부님의 졸업증서와 치과 간판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셨다.

 

제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다리에 기력이 없어지셔서 주로 방에서 책을 보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1900년생이시며 군포에서 면서기 생활을 하시다가,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가 야간 2년제로 개학하던 해에 입학하셨다. 1923년 주간 3년제로 바뀌면서 학비 조달에 어려움이 생겨 1년간 휴학하고 2회로 졸업하셨다.

 

1933년 경기도 수원의 팔달문 근처에 2층 적산가옥을 얻어 ‘이창용 치과의원’을 개설하셨다. 당시 일본인 치과의원도 있었지만, 더 많은 조선인 환자들이 치료받으러 왔다고 한다. 가정집과 붙어 있어서 밤에도 응급환자가 찾아오면 치료해주셨으며 시간이 늦어 교통편이 끊어지면 2층 다다미 방에서 재워주셨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농기구를 이용하여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좀 있었으며, 턱을 다친 환자는 철사를 이용하여 악간고정도 시행하셨다.

 

철도청의 촉탁의로 지정되어 ‘철도의무실’을 겸하셨고, 휴가철이면 철도청에서 해운대행 열차표를 제공받기도 하셨다. 대한치과의사협회 부회장도 역임하셨다 들었고, 각종 치과단체 회무에도 열정을 보이셨다. 1970년대 초반에는 ‘치원’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원로 치과의 소회를 밝히셨다. 아들이 6년제가 처음 도입된 서울치대 15회를 졸업하자 치과를 같이 운영하셨다. 그리스 시대에도 존재했던 세대 간 차이를 임상에서 느끼시고, 70세에 치과를 물려주시고 안양에서 80세까지 사랑방 같은 치과를 운영하시며 지인 분들과 노후를 소회하시다가, 90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제가 기억하는 치과의 모습은 외삼촌이 운영하시던 치과의 모습이었다. 한켠에는 노랗고 하얀 모형들이 있었고, 진료실에는 코를 은근히 찌르는 향이 나고 있었다. 어렸을 적 그런 기억들은 대학 입시에서 과를 선택하거나, 나중에 수련하는 과를 정할 때 막연한 도움을 주었다.

 

2022년 10월, 많은 분들의 노고에 힘입어 박물관에 게시된 졸업증서를 처음 보게 되었다. 날자 표시에 ‘大正 十五 年’이라는 일제시대의 표기를 접했는데, 토지 19권의 ‘천장 위의 뱀이 없어진 듯 하다’라는 표현처럼 낯설었다. 토지의 주인공 ‘길상’과 ‘서희’가 만주 용정과 조선을 누비던 시절이 아득할 수도 있지만, 1922년 입학하신 외조부와 1993년 입학한 저의 70년의 차이를 보면 그리 먼 옛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동료 치과의사들과 찍은 사진과 졸업증서는 ‘유물로 본 한국 치의학의 역사’에서 발췌하였다.

 

강인호 서울미소그린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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